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아이가 작은 개울을 훌쩍 뛰어넘듯 단걸음에 지나가고 있었다. 가을은 처참했다. 이른 봄부터 무더웠던 날들은 구양(九陽)을 태우는 듯한 폭염으로 가을 들판에서 곡식알을 찾기 힘들 정도로 대흉작을 목도(目到) 하기에 이르렀다. 조정은 비상시국이었다. 팔도 감영과 목군현에서 올라오는 장계는 금년의 세금 징수에 일대 경종을 울리는 것들뿐이었다.

"끄응... 금년의 수확이 흉년이었던 작년보다도 더하다는 거 아니요?"

김조순이 자신의 사랑방을 찾아온 조정의 중신들을 보고 말했다.

"작년보다 덜한 것이 아니라 반도 안된다는 겁니다."

박종경이 대답을 했다. 그 옆에는 판의금 조만영과 금위영대장 이효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김조순을 떠 받치는 초석들이었다.

"작년보다도 반씩이나요?"

"그렇다는군요. 대감 나랏일이 큰일입니다."

박종경이 나랏일을 걱정했다.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으나 조선의 관원들은 나랏일을 입에 달고 살았기에 상식에 반하는 일은 아니랄 수 있다.

"허?  올 겨울은 어찌어찌 넘어가겠으나 내년 봄이 문제구료. 춘궁기가 말이요. 더욱이 금년에도 당겨 써버린 환곡으로 팔도의 사창이 텅텅 비었을 터인데..."

김조순이 혀를 차며 말했다. 정승의 자리에서는 한발짝 물러서 있었으나 그에게는 조정의 모든 정보가 몰려들고 있어 나라살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고 있었다.

"금위영의 창고도 텅텅 비었나이다. 환곡을 돌려받지 못하면 겨울을 날 군량마저 부족할 겁니다."

이효헌이 금위영의 살림을 말했다. 이효헌은 박기풍과 더불어 순조시대의 가장 유망한 무장이었다. 이효헌과 박기풍은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창설했던 장용영의 대장을 역임했던 지략과 용력을 함께 갖춘 인물들이었다. 2년 후 청천강에서 홍경래군을 맞아 일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홍경래군의 남하를 막은 일등공신인 이해우가 이 두 사람 밑에서 천총, 파총 등 중간급 장교를 수행한 일도 있었다. 조선 영조 정조 순조대의 무장의 계보는 이장오, 윤태영, 장지항, 구선복, 홍국영, 박기풍 ,이효헌이었다.

"병영에 군량이 떨어진다면 큰일 아닌가?"

김조순이 담뱃대를 꺼내들고 물었다. 길이가 능히 두 척은 되는 장죽이었다.

"환곡을 모두 거두어야합니다."

이효헌이 방안을 말했다.

"거둘 곡식이 있다면 무슨 걱정을 하겠나? 당장 끼니를 걱정할 백성들이 그를 어찌 채울 수 있노?"

김조순이 방법이 못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감 사정을 보아주어선 안됩니다. 일단은 거두고 나서 다시 대여를 해주는 한이 있더라도 거둬야 합니다."

박종경도 이효헌의 말에 동조를 했다. 육조의 장부상에는 수백만 석의 쌀이 있으면서도 실제 창고 안은 텅빈것이 조선의 실정이었다. 조선의 모든 창고의 쌀은 받아낼 기약 없는 대여곡으로 백성들의 곤궁한 살림과 타락한 관료 아전들의 농간 속에서 녹아 없어진 지 오래였고 사정은 모두 아는 일이었다.

"허허 그것참...."

김조순은 답답하다는 듯 연신 혀를 찼다. 열려 있는 문 사이로 노랗게 단풍이 들고 있는 감나무가 보였다. 바람 한줄기가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