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몽학의 난 속에서 한 역사적 인물의 영과 욕이 극적으로 갈리는 장면을 보고 전율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사계 김장생의 모습이었다. 사계는 호서학파의 어머니라 말할 수 있는 인물로 율곡 이이와 우암 송시열 사이에 방점을 찍은 사람이다.

사계는 이몽학이 난을 일으켜 정산현을 함락시키기 전 바로 삼개월 전까지 그곳의 현감으로 재직한 사람이다. 그의 후임이 '정대상'인데 그는 이몽학군이 거사를 일으키자 곧바로 도망을 쳐 조정에 의해 참수된다. 사계 김장생의 보임기간이 조금만 길었다면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록했을지 궁금한 대목이다.

김장생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 상을 하나 받는다. 호서로 피난을 온 종친들을 잘 대접했다는 것이 이유다. 백성들을 규휼하고 전란에 공을 세워 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종친들과 벼슬아치들의 피난살이를 잘 건사한 이유로 상을 받았다는 것은 올곧은 조선 선비의 사표로 군림(?)하는 김장생의 면모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몽학이 정산현 청남에서 반군을 모아 조련을 하고 칼을 갈 때 같은 정산현의 백곡리에서는 '임정식'이란 의사가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노복들과 주변의 젊은이들을 백여 명 모아 공주에서 차의한 '조헌'부대에 들어가 금산전투에서 모두 전사하는 일도 있었다.

충과 역은 이렇게 갈린다. 이몽학과 임정식은 비슷한 연배다. 조선의 피끓는 청년들이 한 지역에서 한 사람은 세상을 개벽하겠다고 나서고 한 사람은 나라에 보국하고 국왕에 충성하겠다고 나서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모습은 아이러니다.

홍경래는 홍산 무량사에서 호서의 협객들을 찾아 부지런히 얼굴을 익히고 지역의 분위기 파악에도 나섰다. 호서는 서북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호서는 율곡과 사계 그리고 우암으로 이어온 사상(思想)의 종향이란 자긍심과 뿌리 깊은 양반우대 풍토가 있는 곳이었다. 사실 이 지역에는 한양의 문벌들의 농장과 별장들이 곳곳에 있었다. 세도가들이 벼슬에서 은퇴를 하고 낙향지로 점찍는 첫번째 고장이 이 지방이기도 했다.

공주나 홍주의 목사들이나 관찰사도 맥을 못추는 곳이 호서였다. 어떤 관찰사가 이곳에 부임을 해와 유력자들에게 인사를 다니다 보니 자신보다 높은 전임 고관들이 십여 명이나 된다는 한탄(?)을 하는 해프닝도 있을 정도였다.

홍경래는 호서에서 일단의 동조자들을 모으지 않고는 거사를 성공시킬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호서는 한양의 턱밑이다. 이곳에서 누군가 기백 명의 동지들을 모아 거사의 흉내(?)만 내주어도 한양 오군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조정은 남북에서 발동한 혁명군에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할 수 없을 터였다.

"이 고개를 넘으면 홍주란다."

홍경래는 대흥현을 지나 홍주로 접어드는 작은 고개를 넘으며 선아에게 말했다. 그들은 도보로 정산현을 거쳐 대흥현을 지나 홍주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홍주요?"

"충청우도의 감영이 있는 곳이지. 서북으로 치면 안주와 같은 곳이란다."

홍경래는 환성에게서 소개받은 홍주의 검계의 패두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충청도에는 이름난 검계가 하나 있었다. 홍주의 물단(勿團)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