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잿가루 위에 아무런 표식도 남아있지 않았다.

(유본학 김광택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풍진 세상을 흥청망청하는 건달도, 선명한 이념으로 사는 절의(絶義)도 한세상을 온전하게 살아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동인의 실종사건 이후 김옥균은 낙심에 빠져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휴...!"

김옥균은 한숨을 토했다. 이동인사건은 충격이었다. 이동인은 인재였다. 경망스럽고 충동적인 성격이기는 했으나 개화에대한 불같은 열정과 뜨거운 정신만은 세상 누구보다 강하고 선명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이동인은 일본어에 능하고 일본사정을 잘 알며 더구나 일본정계와 인맥까지 있어 조선의 대일본 정책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고민을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닐 테고..."

김옥균은 방 한쪽에 놓여 있던 바둑판을 가져다 놓고 책장에서 기보(碁譜) 한권을 꺼내와 반상에 주르륵 돌을 늘어 놓는다. 바둑돌 놓는 소리가 대나무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음..."

김옥균은 바둑마니아다. 상당한 기력의 소유자기도 했지만 그는 바둑을 연구한 학자라 할만하다. 김옥균은 한반도에 들어온 바둑의 시초를 인도로 보고 있다. 바둑이 중국에서 나와 한반도로 직접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인도에서 남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것으로 본 것이다.

한국바둑사에 바둑의 인도기원설을 주장한 사람은 최남선이다. 물론 그 전에 유본학 등이 언급을 한 적이 있지만 그저 들은 풍월(?) 정도고 어느 정도의 논지를 전개한 사람이 최남선인 것이다. 최남선도 바둑의 인도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인 '마원중' '혁단평' 등의 설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연구로 한국바둑사를 논한 것은 허투루 넘길 수 없다.

김옥균의 한반도 바둑인식을 최남선이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 김옥균과 최남선 사이에는 오세창이 있다. 그들은 한 세대를 사이에 둔 선후배다. 이들 세 사람의 바둑인식은 비슷하다. 세 사람 모두 바둑마니아였다. 김옥균은 바둑에 살고 바둑에 죽었다 할 정도로 바둑의 폐인(?)이었고 오세창 최남선은 모두 바둑책을 출간한 바 있다.

최남선은 '조선상식' 속에 '위기'라는 타이틀을 달아 바둑사를 전개한다. 중세와 근대, 그리고 근대와 현대라는 역사의 큰 매듭의 자리에서 한국바둑의 역사를 가늠했던 최남선의 정리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