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혁명 또는 전국시대의 이정표, 최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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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혁명 또는 전국시대의 이정표, 최철한

2004-05-01 프린트｜스크랩

눈부신 초고속 승단

최철한 8단의 입단시절 모습

2004년 한국 프로바둑 최고의 풍운아 최철한(崔哲瀚). 바둑 아는 사람치고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솔직히 나는 그를 잘 모른다. 한국기원 발행 ‘바둑연감’에 실린 대로 1985년 3월 12일 서울출생이며 한국 프로기사 양대 산실 중 하나로 꼽히는 권갑용바둑도장에서 프로수업을 받았고 1997년 역대 4위의 최연소기록(12세)으로 입단한 기재라는 것.

당시 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박성수 사범과 나란히 입단의 관문을 뚫는 ‘사제(師弟)입단’의 미담으로 화제가 되었으며 밤송이를 연상시키는 짧은 머리카락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철담호한(鐵膽豪漢)의 강인한 이미지를 풍겨 내심 ‘그 참, 뜻풀이는 다르지만 철한이라는 이름이 썩 잘 어울리는 친군데?’라고 생각했었다는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최철한의 전부다.

입단 이후 이야기야 7년간의 기록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되지만 그 이외의 것, 최철한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밀어올린 동력의 실체에 접근하자면 보다 많은, 보다 세밀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이런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역시 함께 생활하는 가족이다.

전화를 걸기 위해 ‘2004 바둑수첩’을 펼쳤다. 매년 한국기원에서 발간하는 수첩인데 여기에는 한국기원 및 유관단체, 프로들의 연락처와 인터넷 바둑사이트 주소, 바둑용어풀이 등 유익한 정보가 상세하게 실려있어 기자들에게는 더없이 유용하다(새삼, 바둑수첩을 만들어준 한국기원에 감사).

그런데 바둑수첩에 기록된 최철한은 5단이다. 어? 지금 8단인데? 아, 그렇구나. 이 수첩이 2003년 말경에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 몇 개월 사이에 무려 3단이나 초고속 승단을 기록한 것이구나. 나날이 빠르게 변해가는 현상에 무덤덤하게 적응하고 있다가 몇 개월 전의 기록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한번 놀란다. 그렇구나. 채 느끼지도 못한 사이에 이렇게 훌쩍 커버린 것이구나.

눈이 부시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천원을 따내고 국수를 쟁취하더니 기성을 획득했다. ‘국내타이틀 획득, 1단 승단’으로 바뀐 규정에 따라 3계단이나 껑충 뛰어올라 최고 단위인 입신(入神)에 바짝 따라붙었다. 최근 잉씨배 4강에 올라 결승진출을 노리고 있으니 올해 안에 입신의 반열에 오르는 것도 그리 어려운 목표는 아닐 듯싶다.

이 목표가 이루어진다면 최초의 ‘10대입신’ 탄생이다. 타이틀획득 특별승단에 관한 규정이 일찌감치 제정됐더라면 이창호가 먼저 밟았을 땅이겠지만 아무튼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신천지 ‘10대입신’에 최초로 발을 내딛은 프로의 이름은 최철한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연한, 그러나 필연의 입단

사전에 가지고 있던 최철한에 관한 정보 중 가족을 만나서 확인한 첫번째 오류는 출생지였다. 지금까지는 한국기원 연감 프로기사 명부에 실린 대로 서울로만 알고 있었는데 아버지 최덕순(57세- 부동산업) 씨에게 확인한 결과 부산이란다. ‘부산 거제동에 살다 철한이가 백양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 서초동으로 이사왔다’는 것이다.

최철한의 ‘바둑의 길’은 대다수 기재들이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아마 5단 기력의 아버지에 의해서 평범하게(?) 시작됐다. 아들로부터 특별한 재능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일찌감치 바둑의 폭 넓은 사회적 공능(功能)을 체득하고 있던 아버지의 바람은, 그저 바둑이, 아이의 정서생활에 약간의 도움이 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그저 평생 곁에 둘 수 있는 좋은 취미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91년.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아들에게 바둑을 가르칠 곳을 찾기 위해 권갑용바둑도장’을 노크하면서부터 우연은 더 이상 우연으로 머물지 않았다. 알고 찾아간 것은 아니지만 프로입단을 향한 가장 이상적인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이다. 권갑용 7단은 정상의 토너먼트 프로는 아니었지만 프로의 재목을 알아보고 육성하는 실력만큼은 최고의 프로였다. 권 7단은 한눈에 ‘보석’을 알아보았고 보석은 곧 권 7단의 세공을 거쳐 광채를 뿜기 시작했다.

95년 물이 오를 대로 오른 꿈나무 최철한은 이붕배(우승), 김성준배(우승), 해태배(준우승) 등 전국어린이바둑대회를 휩쓸며 프로입단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했고 서초중 1학년이 된 97년, 한국기원 연구생 1조 진입 1년이 차기도 전에 단 한 번의 도전으로 프로의 관문을 뚫어버렸다. 당시 ‘연구생들의 벽이 높아 일반인 입단은 불가능하다’는 주변의 예상을 뒤엎고 최철한과 나란히 입단해 화제를 모았던 박성수 사범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25개부터 깔고 배우기 시작했는데 불과 2, 3년만에 1급 언저리가 될 만큼 기재가 뛰어납니다. 옆에서 불러도 모를 정도로 뛰어난 집중력이 비결 같아요. 가장 큰 장점은 누구보다도 바둑을 좋아한다는 점이겠죠. 단점은 잘 모르겠고···.”

짧은 밤송이머리에 중학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앳된 얼굴. 그러나 이제 막 껍데기를 깨고 나온 병아리의 포부는 누구보다 당당했다.

“이제 프로 선배들과 바둑을 둘 텐데 재미있을 것 같아요?”
“네, 바둑··· 재미있어요.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두는데 질리지 않아요. 바둑이 좋아요.”

“좋아하는 프로기사가 있다면?”
“이창호 9단요. 그런(이창호 9단과 같은) 바둑을 두고 싶어요.”

“프로기사로서 희망이 있다면?”
“전통의 국수전에서 우승하고 싶습니다.”(월간바둑 97년 7월호 발췌)

월간바둑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이의 입으로 흘러나온 말들은 그 7년 뒤 예언처럼 고스란히 실현됐다. 소년은 ‘바둑이 좋다. 질리지 않는다. 재미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년은 이미 전문가로서 목표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을 천부의 재능으로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일찍이 孔子께서도 ‘知之者不如好之者요 好之者不如樂之者니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어느 분야든 스스로 즐겨 하는 사람이 모든 사람들의 앞자리에 서는 법이다.

귀걸이베이비, 목걸이보이

단란한 가족이다. 아버지 최덕순 씨는 대단한 재산가는 아니지만 근면, 성실한 성품의 사업가답게 두터움을 쌓듯 차근차근 재산을 늘려 남부끄럽지 않을 만큼 알맞은 중산층의 가계를 이루었고 어머니 이미순(54세) 씨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 말없는 내조와 자애로움으로 슬하의 두 아들을 키우며 가정을 지켜왔다.

최철한의 어린 시절 깜찍한 모습

“철한이 어린시절 사진이요? 주변에 항상 사람이 많아서 혼자 찍은 건 별로 없을 텐데···. 근데 얘가요, 남자애답지 않게 어려서부터 반지며 귀걸이, 목걸이 이런 걸 좋아했다니까요.”

이건 또 무슨 얘기? 귀가 솔깃했다. 예상치 않은 어머니의 폭로(?)에 '기원에 약속이 있다’며 막 밖으로 나서려던 아들의 얼굴에 쑥스러운 표정이 떠오른다. ‘아 이거 참, 엄마도 별 소릴 다하시네. 명색이 세계최강국의 국순데···.’ 그렇지만 가족의 울타리 안에 국수, 기성, 천원의 권위는 없다. 그 안의 철한은 가족의 내리사랑을 한몸에 받는 막내둥이일 뿐이다.

하나뿐인 형과는 열 살 터울. 10년 아래의 막내이니 가족 모두에게 좀 귀여움을 받았을까(음, 그래도 그렇지. 사내아이가 반지며 귀걸이에 목걸이라니. 하하, ‘독사’라고 불리는 승부사에게 그런 소녀틱한? 입단 직후 선배들이 통통한 두 볼을 잡아당기며 이뻐했던 이유가 거기 있었나 보다). 처음 알았다. 귀걸이베이비, 목걸이보이 최철한.

당당한 한국바둑의 3관왕이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 막내. ‘철한이가 다 커요? 아유, 제눈엔 아직 애기로 보입니다’라고 하신다. 하긴, 4년 전인가, 농심 신라면배 국가대표로 선발돼 중국에 갔을 때 선봉으로 나섰던 최철한은 늘 대국이 끝나자마자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아빠, 오락하게 10원만 주세요’라며. 그런데 미국유학을 다녀온 뒤 아버지의 새로운 사업을 돕고 있는 형 최석원(29세) 씨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철한이가 늘 승부에 매여 사는 걸 보면 안쓰럽기도 합니다만 같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확실히 다른 데가 있어요. 고집이 꽤 센 편인데도 무엇을 특별히 갖고 싶다든가 하는 물욕은 거의 없거든요. 책도 꽤 읽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엔 ‘야생초 편지’인가 하는 책을 읽고 있던데···.”

아, ‘야생초 편지’는 내게도 있다. 오래 전에 읽은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자연스럽게 떠올려주던 이 책은 학원간첩단사건에 연루돼 13년 2개월 동안 양심수생활을 한 황대권 씨의 옥중서간 중 야생초에 관한 편지만을 모은 것. 문화방송의 ‘느낌표’ 선정도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건 그렇고 입단 직후에는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바둑을 둬도 질리지 않고 재미있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고집은 센데 바둑 이외의 것에는 거의 물욕을 보이지 않는다’고? 그렇구나. 조금씩, 이창호를 넘어선 최철한의 힘. 그 실체가 조금씩 느껴진다.

눈꺼풀을 떼다

탁월한 재능이란 구름 속의 햇살과 같아서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감춰둘 수 없는 것이다. 최철한은 프로입단 초기부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입단 3년 뒤인 2000년.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한국 프로바둑 풀예선의 정글을 헤치고 나와 농심 신라면배 국가대표가 됐다. 국제무대 첫 출전이라는 중압감 따위는 아예 없었다는 듯 거침없는 질주로 중국과 일본의 정상급 강자들을 꺾고 3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2000년도의 주인공은 최철한이 아니었다. 이때는 2년 선배인 이세돌이 32연승이라는 폭풍의 질주 속에 천원, 배달왕 타이틀을 쓸어담고 있을 때였다. 그 기세는 반석 같은 최고의 위치에 있던 세계최강 이창호조차 최우수기사를 양보해야 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모든 세상 사람들의 눈이 이세돌을 향하고 있을 때 스승 권갑용 7단만큼은 최철한을 좀더 주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권 7단은 이렇게 말했었다.

“세돌이요? 재능 정말 뛰어나죠. 이미 입증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철한이의 재능도 못하지 않다고 봅니다. 아니, 집중력, 인내력 같은 기질의 조건을 볼 때는 오히려 철한이 쪽이 나은 점이 있어요. 지금은 특별한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지만(이세돌에 비해서) 조만간 치고 올라올 겁니다. 두고 보세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르치며 지켜본 스승의 눈은 확실히 다른가 보다. 과연, 최철한은 스승의 기대와 관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한번 농심 신라면배 국가대표로 선발돼 연승을 거두더니 2002년에는 한 단계 더 올라서서 국내최고 상금을 자랑하는 KT배 결승무대에 올라 ‘천하의’ 조훈현과 자웅을 겨루었다. 결과는 1승 2패. 타이틀 획득 실패였지만 그 내용에서는 바둑저널로부터 ‘조훈현을 압도했다. 특히 결승3국은 최철한이 질 수 없는 바둑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분야에서 어느 한순간 홀연히 차원이 다른 경지에 올라섰을 때 흔히 ‘눈꺼풀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 표현은 면벽수행 중 찾아오는 수마(睡魔)를 쫓기 위해 눈꺼풀을 잘라냈다는 달마(達磨)의 고사(古事)에서 유래된 것이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나 할까.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결승무대의 번기(番棋)를 통해 당대 최고의 거장과 맞겨룬 이 ‘특별한 경험’은 모호한 안개 속에 엎드려 있던 최철한의 자신감을 단숨에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신예프로들은 대단히 행복할 것 같다. 조훈현이 나이 50을 넘어서도록 정상을 활보하고 이창호가 10년 이상 정상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이들 사제(師弟)와 겨루는 신예들은 ‘성자(聖者)의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은 공능을 갖춰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예들은 조훈현-이창호 사제가 한국바둑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크게 감사할 일이다.

정상으로 뛰어오르다

프로에게 패배는 상처다. 제각기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다르고 회복되는 기간 또한 다르지만 이 상처는, 승부를 포기하지 않는 한 프로의 숙명으로 이어진다. 입단 이후 별 장애 없이 정상을 향해 수직상승한 것으로 보이는 최철한에게도 그런 상처와 치유의 시기가 있었다. KT배의 패배는 철한에게 분명히 ‘눈꺼풀을 떼는’계기가 됐으나 다 잡은 타이틀을 놓쳐버린 결승3국의 패배는 지독한 상처였다.

최철한은 KT배 결승 이후 약 1년 가까이 상처를 핥는 맹수의 모습으로 지냈다. 바둑저널이 ‘송아지삼총사’라는 영예의 호칭으로 한데 묶어준 동갑내기 박영훈, 원성진이 세계무대에서 약진할 때 최철한은 그 뒤로 물러나 있었다.

박영훈이 천원전 우승, 농심 신라면배 4연승, 삼성화재배 준우승의 실적을 올리고 원성진이 2년 연속 LG배 4강 진출, 농심 신라면배 3연승으로 활약할 때 최철한이 세계무대에서 거둔 실적은 삼성화재배 16강 진출이 전부였다. 입단 이후 박영훈, 원성진보다 늘 한발 앞서 질주하던 페이스가 흔들리는 것 같았고 1년 후배 송태곤까지 천원전 우승, KBS바둑왕전 우승, 후지쯔배 준우승으로 최철한을 추월한 듯 보였다.

그러나 터널은 길지 않았다. 최철한은 2003년 내내 그냥 어둠 속에 엎드려 있지만은 않았다. 동갑내기들이 세계로, 세계로 나아갈 때 몸을 일으켜 세워 국내무대에서 정상을 향한 도약의 발판을 다졌고 그 결실이 2003년 달력의 마지막 한장에 드러났다. 제15기 기성전 도전자결정전 진출, 제47기 국수전 도전권 획득. 그리고 제8기 천원전 우승.

1인자 이창호가 출전하지 않는 작은 규모의 기전이지만 천원전 우승의 의미는 무엇보다 각별했다. 천원전은 이세돌, 박영훈, 송태곤으로 이어져온 신예들의 등용문, 정상을 향한 엘리트코스였다.

여기서, 그동안 상대전적 1승 5패의 극단적 열세를 보였던 동갑내기 라이벌 원성진을 뿌리치고 우승했다는 사실은, 최철한에게 우승 그 이상의 각별한 의미를 안겨주었다. 그것은 2002년 KT배 결승 패퇴로 고개 숙였던 자신감의 회복이었다. 아울러 이 우승은 2004년의 핵폭풍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2004년 1월 중국 윈난(雲南) 따리(大理)에서 막이 오른 제47기 국수전 도전1국은 국수 타이틀 통산 8기 제패. 45, 46기 연속제패를 기록중인 이창호의 승리로 끝났다. 사람들은 이 결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한국바둑을 세계정상으로 끌어올린 스승 조훈현으로 천하를 넘겨받은 이창호는 그만큼 강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최철한의 국수쟁취’가 아니라 세계가 뒤를 쫓는 최강자 이창호에게 어느 정도나 버틸 수 있겠느냐에 있었다.

그런데 그 관심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낭만적인 추억의 국수 노사초의 고향 함양에서 속개된 도전2국은 최철한의 내면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맹수의 포효(咆哮)를 생생하게 들려준 무대였다. 대 이창호전 4연패 끝의 첫 승리는 최철한의 가슴 깊이 가라앉았던 웅지(雄志)를 불러 일으켰고 국수전의 승부는, 사람들의 예상 밖으로 줄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이창호의 압도적 승리가 예상됐던 대회전(大會戰)은 흑번필승(黑番必勝)의 구도로 흘러갔다.

그것은 숙명일까. 최철한이 국수 도전의 와중에 또 하나의 타이틀 기성 도전권을 획득해 이창호에게 더블매치를 신청해둔 상태였다는 것. 그 도전1국이, 한껏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2승 2패의 상황에 이른 국수전 도전4국 직후로 이어졌다는 것. 그리고 이 대국에서도 흑번필승의 구도대로 흑을 쥔 이창호가 승리했다는 것. 만일, 이 대국이 국수전 도전5국이었다면 이창호의 국수 방어로 막이 내리고 이후의 상황 역시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하필이면 국수전 도전4국 직후에 기성전 도전1국이 끼어 들어 흐름의 변화를 일으켰을까. 그것은 전지전능한 신의 몫.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최철한은 기성전 도전1국 뒤로 밀린 국수전 도전5국에서 승리했다.

최철한은 국내 최고(最古)의 전통을 자랑하는 국수전의 아홉번째 적통을 잇게 됐고 이창호는 그 대가로 기성전 도전5번기의 선승을 취한 셈이 됐다. 이 대국 역시 승자는 흑을 쥔 쪽이었는데 국수를 빼앗긴 이창호로서는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뼈아픈 거래였다.

국수전 도전4국 이후 변조(變調)를 보인 대회전의 흐름은 완연한 최철한의 페이스가 됐다. 기성전 도전2국부터 파죽지세의 3연승. 국수전부터 이어졌던 흑번필승의 구도는 기성전 도전3국에서 백을 쥔 최철한의 승리로 무너졌고 최종국이 돼버린 도전4국은 최철한의 ‘후지쯔배 식중독사건’으로 이창호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각지대로 몰아붙여 완패의 낙인을 찍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후지쯔배 식중독사건의 전모는 대충 이렇다.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쯔배 8강에 오른 최철한은 저녁식사로 나온 회를 먹고 배앓이를 했다. 가벼운 배탈 정도가 아니고 제법 무거운 병치레였다. 일행 중 함께 회를 먹은 동갑내기 박영훈도 비슷한 증세로 고생했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통증이 멈추지 않아 병원엘 갔다. ‘식중독에 의한 장염’.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지만 신체리듬을 악화시키기에는 충분한 병이었다.

치유는 어렵지 않으나 시간이 문제였다. 후지쯔배를 마치고 돌아온 날이 4월 13일인데 기성전 도전4국이 16일로 잡혀있었고 대국당일 아침까지 배앓이가 계속됐다. 의사와 가족은 안정적인 치료를 위해 대국 포기를 권했으나 최철한은 ‘대국은 꼭 해야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누가 ‘국수급 최씨고집’을 꺾겠는가. 병원측은 진통제가 섞인 링거를 투약하는 임시처방으로 풀어주었다. ‘단, 물은 절대 마시면 안된다’는 고통스런 주문과 함께.

최철한은 대국당일 아침에 벌어진 이 소동으로 대국실에 15분 늦게 입장했고 제한시간에서 30분을 공제당했다. 장염으로 뒤흔들린 신체리듬, 지각으로 인한 제한시간 공제. 11년간 지켜온 타이틀을 방어하기 위해 배수의 진을 친 기성. 막판 벼랑으로 몰아놓기는 했지만 환경의 조건으론 누가 보아도 도전자의 승리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철한의 기성쟁취를 최대한 돋보이게 준비된 사전 연출이었다. 15분 늦게, 창백한 얼굴로 나타나 기성과 마주앉은 도전자는 환자가 아니었다.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반면운영은 이전까지 보여준 최철한의 그 어떤 ‘류(流)’보다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지막대국은 도전자의 완승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무서운 링거의 투혼(鬪魂)’이라고 혀를 내둘렀으나 승리를 이끌어낸 동력은 통속적인 ‘승부사의 투혼’이 아니었다.

그것은 ‘몰입의 힘’이었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혓바닥이 바짝바짝 마르는 갈증까지 잊을 수 있었던 것은 ‘싸워 이기겠다’는 투지가 아니라 97년 프로 입단 인터뷰에서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바둑을 둬도 질리지 않아요. 바둑이 재미있어요’라고 밝힌 이후 단 한차례도 버린 적이 없는 마음가짐, 순일무잡(純一無雜)한 몰입의 힘이었다.

최철한은 중국 상하이에서 이어진 잉씨배 8강전에서 다시 이창호와 마주쳤다. 잦은 세계최강자와의 격돌은 최철한의 성장을 대변하는 방증. 최철한은 이 대국에서 또 한번 이창호를 밀어내 국수, 기성 쟁취가 우연한 행운이 아니었음을 만천하에 과시하며 대 이창호전 통산 상대전적에서도 2003년 이전 4연패에서 7승 6패로 앞서기 시작했다.

천원, 국수, 기성 쟁취로 이창호와 국내타이틀을 양분하는 구도를 그려낸 최철한은 바둑저널의 프로랭킹 설정에서 단숨에 2위까지 솟구쳤다(비록, 한국기원의 기록이 아닌 비공식집계이긴 하지만). 이세돌의 LG배 우승과 후지쯔배 연속제패에 다소 인색한 평가를 내렸던 보수성향의 평론가들까지도 최철한의 서열에 관해서는 이례적인 호의를 보였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최철한의 바둑 안팎에서, 10여년 전 이창호가 보여준 것과 유사한, 흔들리지 않는 지속적인 두터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최철한은 ‘타이틀 쟁취 이전과 이후의 느낌이 어떠냐’는 질문에 두 가지의 느낌을 이야기했다. 자신감과 책임감. ‘타이틀을 획득한 뒤 자신감이 더욱 커졌고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을 안겨준 말이다.

자신감이야 젊은이들의 특권이니 그렇다 쳐도 책임감이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그 말을 ‘타이틀 보유자로서 바둑계 안팎의 모든 시선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는 말로 이해했다. 어떤가. 7년 전 프로입단의 소망대로 국수의 적통을 이은 열아홉 청년의 말이.

이만하면 한때 ‘순수한 승부만으로 밥을 해결하는 프로기사가 10%도 되지 않는다는 관계자들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철한이가 바둑을 이쯤에서(초등학교 4학년 무렵) 포기해주기를 원했지만 중도에서 포기하긴 싫다는 의지가 워낙 강해 말릴 수가 없었다’는 아버지도 이제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리라 믿는다.

앗, 이젠 광고계까지? 꼭 연예인 같죠?

그러나 아직은 작은 완성이다. 최철한에 대한 한국 프로바둑의 기대는 타이틀전선의 분할점령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땅의 프로바둑을 태동시킨 조남철 선생으로부터 김인, 조훈현, 이창호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이어온 진정한 국수(國手)의 신뢰를 이어가는 큰 바둑의 출현이다. 여전히 건재한 천하의 조훈현, 1인자 퇴위를 거론하기에는 너무 젊고 강한 이창호가 그런 후진, 정예들의 경쟁을 독려하는 정상진입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최철한은 역성(易姓)혁명 또는 전국(戰國)시대의 이정표다. 이창호와 최철한이 천하를 양분하는 시대가 되든, 최철한이 타이틀전선에서 이창호를 완전히 밀어내고 자신의 시대를 열어가든, 이세돌, 송태곤, 박영훈, 원성진 같은 신진기예들이 밀고 밀리는 혼돈의 전국시대가 열리든 그 모든 전장(戰場)에 넘쳐 흐르는 활기찬 동력은 세계바둑을 이끌어가는 한국의 힘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의 바둑팬들은 또 한번 즐겁고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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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霧猛狼

｜ 2004-05-02 오전 1:57:00 [동감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