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문치국가다. 조선은 문과 덕으로 치국의 철학을 삼아 나라의 존망이 저울대에 올려진 순간에도 의리(義理)를 갈등하던 도덕국가이자 문화국가라 할 수 있다. 조선 오백년을 통해 문과 덕으로 국가를 경영하려 한 증거라면 필자는 정보기관의 미설치를 들고 싶다. 조선에는 공식적인 정보기구가 없었다.

조선은 명을 숭명한 나라다. 명나라의 문물을 동양의 어떤 나라보다 빠르고 넓고 깊게 받아들인 나라가 조선이다. 명나라에는 악독한 정보기구가 있었다. 동창, 서창, 내밀창이 그것이다.

동창은 관원들을 감시하는 기구다. 서창은 일반 백성들을 감시한다. 내밀창은 아예 동창과 서창을 감시한다. 이들 삼창의 책임자는 모두 환관이다. 위충현, 원숭환 등 유명한 환관정치의 군상들이 이곳에서 출현한다.

조선은 명나라의 이것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의 건국이념이 '주례'에 있었고 그것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주례'는 언로를 중시한 언론정치를 권장했다. 조선은 군왕과 몇몇 측근들의 밀실 야합으로 정치를 하는 정보정치를 타파하고 공론화를 중시한 여론정치를 지향했다. 그 속에서 군왕과의 독대금지, 모든 유생들이 왕에게 직접 상소를 하는 제도를 택한다.

광해군의 실각과 함께 왕위에 오른 인조9년 옥천에 사는 한 이름없는 유생이 한양에 와 비밀상소를 올린다. 이날 사건은 승정원일기에 간략하나 숨막히는 긴장감이 묻어 있다. 조흥빈의 상소문은 입직승지의 손을 통해 인조에게 곧바로 올려진다. 중간에서 상소를 읽어본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밀봉인 탓이다. 만약 상소로 기군망상을 시도한다면 그 사람은 죽은 목숨이다. 군왕에게 올려진 직보상소는 이래서 무게가 있다.

인조는 상소문을 보자마자 모든 대신들을 소집하고 각사의 낭관(실무자)들을 대기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상소의 내용은 국체를 흔드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실록의 같은 날짜에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실록의 연관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조흥빈의 상소는 청주 공주 일원에 반란의 조짐이 있고 난을 꾸미고 다니는 사람들의 신원이 특정되어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인조의 명을 받은 금부와 포도청은 즉각 발동하여 공주 옥천 청주 등에 흩어져 암약하던 16명의 용의자를 체포 수사하게 된다. 촌각을 다투는 금부 포도청의 전광석화의 작전에 백여 명의 반란 용의자들이 줄줄이 잡혀온다.

이들의 활동무대가 장난이 아니다. 청주, 옥천, 공주, 덕산, 순창, 보성, 평택 등 충청 호남 경기도를 망라하고 있고 반란의 주모자들은 전국에 8대장들이 있어 군대를 동원하기로 되어있다는 진술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들중 문일광(文一光)의 진술이 흥미를 끈다.

- 약재를 구하러 정부의 집에 갔더니 승려 승윤(勝允)이 있어 자칭 바둑의 고수라하기에 두어 판을 두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후에 다시 갔는데 승윤과 또 다른 승려가 있어 담소를 나누던 중 내가 아직 진인(眞人)을 보지 못했는데 바로 당신이 진인이시구료 하며 '장도저적설' 즉, 머나먼 길에 눈이 쌓여 막히도다,라는 시를 지어주기에 가지고 온 것입니다.(文日光供稱: “爲覓藥材, 往鄭榑家, 僧人師聖、勝允在座。 自言善奕, 對着二局而罷。 其後又往榑家, 則兩僧又在坐言曰: ‘未得見眞人, 無乃在近否?’ 仍贈以長途阻積雪之詩云)

문일광의 진술은 진인을 말하고 있다. 진인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한양의 왕기가 쇠퇴하고 새로운 곳에 왕기기 서린다는 것이다. 계룡산이 그곳이란 것이다. 많이 들어본 소리지 않은가.(王氣未衰, 不可輕動, 故還寢, 而仍往雞龍山, 泛鐵相宅, 以爲定都之計.)

정감록을 연구한 학자들은 조선실록에서 정감록의 출현을 영조 때가 시초라고 보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점은 시정되어야 한다. 실록의 일독 없이 데이타베이스에서 검색한 용어를 들어 이런 논지를 전개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정감록을 이용하여 충청 호남지방을 돌며 동지들을 모으던 승윤과 태허는 동조자인 척하면서 역으로 고변상소를 올린 조흥빈의 밀고로 결딴이 난다. 이 사건으로 승윤 태허 정한 등 30명이 참수를 당하고 10여 명이 조사 중에 물고(사망)를 당한다. 기타 유배자 6명에 50여 명이 죽지 않을 정도로 곤장을 맞고 풀려나는 대규모 옥사로 끝을 맺는다.

필자는 '한국바둑사'에서 바둑이 혁명을 꿈꾸던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사건에 등장한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자칭 바둑의 고수라던 승윤이 바둑과 정감록을 이용하여 동지들을 모으던 대목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참고로 이 사건이 있던 수년 전에 일본에서 사신단이 온 적이 있다. 그들의 선물목록에 바둑판과 바둑알 몇 조가 있었다. 조선은 바둑판과 바둑알을 받지 않고 돌려보낸다. 이유는 바둑을 두며 놀만큼 조선이 한가하지 않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원문 (沃川居幼學趙興賓祕密上疏。入啓。傳曰, 大臣·禁府堂上, 命招。因政院啓, 兩司長官, 亦爲命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