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갯속 세상

은빛으로 부서져 내리는 빛살을 받으며 출렁출렁 춤을 추었다. 비늘을 터는 은어처럼 퍼덕일 때마다 환한 빛살은 안개처럼 내려와 마음 속 깊이 가라앉은 욕망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것은 쾌감이라기보다 감미로운 환희였다.

‘아, 그만.’

사내의 손끝이 여인의 가장 예민한 꼭짓점을 맴돌았다. 치렁한 머리와 우수에 젖은 눈망울. 옷이라는 껍질을 벗어던진 나신(裸身)은 아름다운 비너스 조각품이 연상될 만큼 눈부셨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처녀 특유의 독특한 향기가 아지랑이처럼 감실대며 올라왔다. 물미역과 석창포를 비벼놓은 듯한 감미로운 냄새를 음미하며 유두를 혀끝으로 일으켰다. 처녀라면 부드러운 혀의 자극만으로 고통을 느끼기에 충분한 테크닉이었다.

“추워요.”

그녀는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두 손을 여인의 팔 밑에 넣고 그 손으로 머리를 고정시킨 건 가끔 취재 길에서 만난 처녀들을 길들일 때 쓰던 수법이었다. 천천히, 결코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힘을 밀어 넣었다. 여인은 얼굴을 제치듯 하면서 고통스럽게 비명을 올렸다.

“아앗.”

성문을 열어젖힌 침입자의 중심부에 강한 힘이 압박해오자 둘러싼 부위들이 침입자의 출입을 완강히 저지하며 함부로 들락거리지 못하도록 압박했다. 천천히 움직였다. 중심부가 심하게 떨렸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고통을 참지 못해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것은 오히려 여인의 몸에 몰아닥친 고통이 오래갈 뿐이었다.

멈칫거릴 이유가 없었다. 여인의 애원을 무시하고 거칠게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고통스러운 여인의 신음 속에 환희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 갑자기 접시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쨍그랑!”

모든 그림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꿈이었다. 황홀한 그림은 한순간에 스러지고 사과를 놓아둔 접시만이 상 밑에 떨어져 박살난 파편을 사방으로 튀겨놓았다. 후다닥 상 위에서 뛰어내린 쥐는 문지방 넘어 대나무 숲으로 도망쳐버린 뒤였다.

“저런, 저런.”

주위를 돌아보자 역한 땀내가 코를 찔렀다. 어느 틈에 나갔는지 초하의 모습은 없었다. 아직도 이불 속엔 아련한 그녀의 체취가 남아 있어 그것 때문에 꿈길이 고약했던 게 아닐까.

문득 주변 일이 궁금해졌다. 일본으로 출장 간 민우기 사장이 돌아왔는지도 궁금했다. 문득 책장 옆에 놓인 티브이 곁으로 다가가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띠디딕 거리는 구닥다리 흑백 티브이 화면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그것은 아침 6시 10분에 시작된 ｢저명인사를 모시고｣라는 개편된 프로였다.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에, 어제 이 시간에는 일본에서 대단한 활약을 보이고 있는 ‘기인전’이란 프로 기전에서 우승한 시미즈 게이꼬라는 여류기사와의 흥미로운 대담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둑에 관한 상식이 잘못 전해진 것을 알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방면의 대담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던 한국여류기사회 나문희(羅雯禧) 회장이 멀티화면에 보조사회자로 모습을 나타냈다. 하루 전에 촬영한 것이어서 그런 대로 생동감이 살아 있었다.

“···그러니까 대정 7년인 1918년, 일본에서 발행된 [기도(碁道)]라는 잡지에는 ‘조선의 변기(變碁)’라는 제목으로 샤미세이(社未生)라는 필명의 바둑 기자의 글이 실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조선에서 망명한 김옥균의 설을 이용하여 몇 가지 비단 실 꾸러미같은 얘기들을 풀어헤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바둑은 중국의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바둑은 고대 천축국(天竺國 ; 인도의 고대 명칭)에서 발명되어 중국 등지로 전래되었다. 당시 천축은 골패나 주사위 등의 게임 문화가 중국보다 앞선 것이 그 이유다.

둘째, 중국의 바둑은 조선에서 전해졌다. 어떤 사람은 천축국에서 직접 중국으로 전해졌다지만, 조선에서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고 신빙성 있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은 천축의 문화를 직접 수입해도 좋을 만큼 발전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은(殷)나라의 황숙 기자(箕子)가 나라의 소란을 피해 조선에 망명했다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배워 돌아가 주나라의 이륜(彛倫;인륜)으로 삼았다는 죽서의 기록 등이 이를 대변해 준다.

셋째, 일본의 바둑은 당(唐)나라 때 길비진비(吉備眞備)라는 대신이 중국으로부터 전래시킨 것이 아니고 조선으로부터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나문희 회장은 잠시 말을 끊고 해묵은 고서를 펼쳐들었다. 하나는 [설문(說文)]이었고 다른 하나는 [원혁(原奕)]이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책은 후한사대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입니다. 순 임금의 아들 상균이가 몹시 어리석어 바둑을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진(晉)나라 때 장화(張華)는, 요 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그 아들 단주를 가르쳤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 당(唐)나라의 학사 피일휴(皮日休)는 [원혁]이라는 글에서, 요 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그 아들을 가르쳤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며 바둑은 훨씬 후대인 전국시대 발생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무렵의 바둑은 [예경]에 쓰인 것처럼 종횡이 각각 17로(路)로 합계가 289로였으며 흑백의 돌이 각각 150매였다. 이후 진나라를 거쳐 361로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나문희 회장은 마무리를 지었다.

“허신의 주장을 받아들여, 순 임금이 아들 상균이를 깨우치기 위해 바둑을 만들었다면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한서]나 [삼국지] 등에 바둑에 관한 우리나라의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누가 언제 바둑을 우리나라에 전래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를 소상히 다룬 [한서]나 [삼국지]에 그런 내용이 없다는 것은 결코 바둑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