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멈춘 엘도라도 섬에는 지금 비가 내린다. 전국민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듯 전국에 ‘잔인한 4월의 봄’을 배웅하는 비가 내리고 있다. 시간이, 바람조차 쉬어가는 곳, 증도의 엘도라도리조트에는 ‘Mlily 몽백합 이세돌-구리 10번기’ 제4국의 긴장감이 더해 숨조차 멎었다.
10번기 최대의 분수령. 제4국은 이세돌 9단이 3-1로 달아나며 우세를 확립하느냐, 2-2 타이를 허용하며 초반 2-0으로 잡았던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겨주느냐를 가름하는 한판이다. 이 한판이 10번기의 승패를 좌우할 확률이 높다. 두 기사 모두 산전수전을 겪은 맹장으로서 숱한 벼랑끝 싸움을 경험했겠지만, 일생일대의 단 한판, 절체절명의 승부를 꼽으라 한다면 바로 이 한판일 것이다.
○● 이세돌-구리 10번기 4국 전야제 스케치 ☜ 클릭
20여분 전 대국장에 나와 상대를 기다린 이세돌
대국장에 먼저 들어선 기사는 이세돌 9단이었다. 대국시간은 9시 정각. 20여 분이나 앞서 대국장에 들어왔다. 대국장은 생중계를 준비하는 바둑TV 스태프들과 빼곡한 사진기자들로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이9단은 바로 대국의자에 앉지 않고 TV 스테프들 뒤쪽에 서서 양재호 총장과 이주배 기전사업국 매니저들과 담소를 나누었고 형 이상훈 8단과 잠시 퇴실했다 10분 후에 다시 들어왔다. 담배 한 대로 마음을 추스렸겠지만 잔잔한 긴장감까지 모두 떨쳐버린 얼굴은 아니었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아무리 대기사라도 모든 승부 앞에서는 떨리는 법이다.
9분 정도를 남기고 이세돌 9단은 자리에 앉아 구리 9단을 기다렸다. 앉자마자 방송조명을 좀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눈이 부셨다. 바깥세상에서 9분은 잠시지만 대국장에서 상대를 기다리는 9분은 길었다. 잠시 눈을 감고 묵상을 하기도 하고 몸을 좌우로 비틀어 근육을 풀어주기도 했다. 녹차를 홀짝이기도 했다.
3분 전, 드디어 구리 9단이 나타났다. 강렬한 방송조명 탓인지 눈가와 이마가 약간 홍조를 띠었다. 아무 표정없이 성큼성큼 들어와 맞은편에 앉는다.
서로 미세한 눈인사도 없다. 앉자마자 허공을 응시하는 건지 취재진 쪽을 휘이 바라봤을 뿐. 그런 다음 상대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세돌 9단은 미동도 않았다. 이 10번기가 끝날 때까지는, 친구가 아니라 쓰러뜨려야할 적이다.
▲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승부사에게 이 시간은, 서로 응시하는 찰라의 순간조차도 괴롭기 때문이다.
지난해말 열린 10번기 개막식에서 구리 9단은 “이세돌 9단은 60세가 되어도 반상에서 겨루고 싶은 상대다. 10번기는 내 인생, 바둑의 경지, 프로기사의 생애까지 모든 측면에서 중요하다.”라면서 “이세돌 9단과 결승에서 세 번 맞붙어 두 번 패하고 한번 승리했으니 이번 10번기에서는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10번기 가운데 단 한번 한국에서 열리는 이 대국(4국) 전야제에서 “컨디션이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상대가 양보해 줄 것”이라 기대했다.
10번기 개막식에서 이세돌 9단은 “구리 9단은 내 바둑 인생에서 최고의 선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자주 가는 곳이다. (9번을 적지에서 싸우지만) 불리할 것도 없다. 긴장하지 않고 유쾌하게 임하겠다.”고 각오를 밝힌 바 있다.
10번기는 선진적인 룰을 적용한 시험대
돌은 룰에 따라 구리 9단이 흑번. 입회인 왕루난 주석의 대회규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 이어 10번기의 분수령이 될 4국이 시작되었다. 10번기는 최신 중국바둑 규칙을 적용한다. 제한시간은 3시간 55분에 초읽기 1분 5회. 점심시간은 없다. 초시계는 선수가 직접 누른다. 초를 읽는 언어는 중국어나 영어 중에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초시계는 반드시 백을 든 선수의 오른쪽에 둔다. 구리는 당연히 중국어 초읽기를 택했고 이세돌 9단은 영어를 택했다.
김성룡 9단은 이번 10번기를 두고 ‘진보적인 요소를 택한 선진적인 대회’라고 했다. 계시원이 없고 대국자가 초시계를 누른다. 이것은 계시원이 고무줄 초읽기에 대한 분쟁의 싹을 아예 없애는 일이며, 식사시간을 따로 두지 않는다. 이것 역시 식사시간에 다른 사람의 훈수가 끼여들 여지를 없앤 처사다. 이에 대한 엄격한 규정은 지금까지 없었다.
▲ 10번기 4국의 계시기. 이세돌 9단은 영어 초읽기를 선택했다. 중국룰에 따라 두어지는 대회라 한국어 초읽기는 없다.
9시 정각에서 2분이 지난 뒤 구리 9단의 첫점이 놓였다. 우상귀 화점이었다. 이세돌 9단 역시 2분을 뜸을 들인 뒤 좌하귀 화점으로 응대했다. 세 번째 수 또한 2분 숙고 후 우하귀 소목에 놓였고, 네 번째 이세돌 9단의 선택 또한 2분여 뒤에 좌상귀 소목으로 두었다. 두 기사가 약속이나 한 듯이 2분여 간격으로 네 수를 두었다. 아마 사진기자들을 위한 암묵적인 배려였을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수부터는 급격히 간격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약속된 10분의 촬영시간이 5분이나 넘기고 끝났다. 그만큼 취재열기가 뜨거웠다.
▲ 드디어 첫점.
▲ 이세돌 9단도 화점으로 응했다.
초반의 갈림길
초반 포석의 갈림길은 아래 <장면도> 백10에 붙였을 때였다. 구리 9단은 육감적으로 이 대목이 흐름을 가르는 한수라 판단했음인지 길게 장고했고 이 수를 갈림길로 착수가 흘러갔다. (대국 추이를 보시려면 사이버오로 홈페이지에 오르는 속보(1시간 간격으로 업데이트 중)와 더불어 사이버오로 대국실 <오로1서버>에서 이번 LG배 32강 본선에 오른 안국현 4단이 해설하는 생중계를 보시길.)
▲ 백10의 붙임이 초반 갈림길이었다.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전날 이세돌 9단은 낙지와 불고기를 먹고 싶다고 했다. 엘도라도리조트의 레스토랑 메뉴에서 골랐다. 들이는 시간은 정오~12시반 사이면 좋지 않을까, 말했고 한국기원 관계자는 12시10분에 식사를 넣기로 했다.
구리 9단은 “식사는 굳이 필요 없고 과일이면 좋겠다. 특히 바나나를 꼭 포함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수시로 간식으로 요기를 할 참인가 보다.
대국실 바로 옆방이 휴게실이다. 원형테이블 두 개가 한폭의 병풍을 사이에 놓고 덩그라니 놓여 있고 여기서 간식과 식사를 하며 잠시잠시 쉰다. 점심식사에 앞서 오전11시 두 기사에게 김밥과 샌드위치, 과일이 간식으로 들어갔다.
▲ 오전대국 촬영을 끝낸 뒤 살짝 들어가본 휴게실. 이세돌 9단의 테이블엔 아직 아무것도 놓이지 않고 명패만 달랑 보였다.
▲ 구리 9단의 테이블엔 초코릿 한개와 작은 바나나 2개가 들어간 2개의 팩이 준비되어 있었다. 바나나는 구리 9단이 특별히 주문한 간식(겸 식사대용)이다.
오전 대국장 스케치는 여기까지다. 점심시간이 따로 없으므로 기자들에게 관례적으로 주어지던 점심식사 후 10분간 대국촬영은 없다. 당연히 대국에 방해가 되므로 휴게실에서 점심을 먹는 장면 또한 찍을 수 없다. 취재기자가 대국장에 다시 들어설 수 있는 시간은 대국이 끝난 직후, 복기시간이다. [현지취재=정용진, 김수광 / 사진협조=이시용]
▲ 뜨거운 취재열기.
▲ (눈칫밥 잔뜩 먹으며 ^^;;) 병풍 뒤로 돌아가 한 컷.
○● (관련기사) 부담은 덜었지만 아주 힘든 승부가 될 것이다! ☜ 클릭
○● (관련기사)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 (관련기사) (종합) 구리, 이세돌 고향서 따라잡다
○● (관련기사)구리, 10번기 4국 승리
.gif){kind=lo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