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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달 19로 산책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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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2013-04-23 오전 9:55 조회 5969추천 9   프린트스크랩

첫눈.

 

장호원읍에 내릴 때부터 음산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촬영 내내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신인을 기용해서 찍는 잔잔바라다. 잔잔바라란 무술영화를 일컫는 은어다. 잔잔바라가 아니면 대역을 하는 이들이 어떻게 먹고 살겠는가 말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조명을 담당한 조명담당이 바람에 흔들리는 조명 판을 들고 쩔쩔맨다. 낙엽이 함부로 굴러다니고 영화를 찍는 이들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함부로 나부낀다. 내가 맡은 역할은 시골 건달 중 한명이다. 주인공이 지나갈 때 시비를 걸고 얻어터지는 역이다. 제법 비중이 있는 역이라 분장사들이 신경을 쓴다. 이마에 흉터하나 새기고 이소룡이 즐겨 입는 노란 트레이닝을 입고 담배를 피워 문다. 다리를 건너가는 연인에게 시비를 건다.

"햐 그년 통통 튀겠네, 볼륨이 죽이는 구나."

내가 야지를 놓는다.

"그냥 가 무섭다."

하늘하늘한 몸매의 여자가 말한다. 그러나 저 잘생긴 사내놈 신인배우가 그냥 지나갈 폼이 아니다.

"취소해 주시오"

사내가 천천히 걸어와 내게 말한다.

"뭘 취소해 임마, 내가 뭔 소리 했냐?"

내가 생각해도 뻔뻔한 대답이다.

"내 여자 친구에게 한 모욕적인 언사 말입니다."

"네놈 여자 친구가 목욕을 하던지 수영을 하던지 왜 나한테 시비냐? 죽고 싶냐?"

나는 놈의 멱살을 잡는다. 키가 훤칠하다. 시골깡패가 무슨 시골깡패가 키가 일 미터 팔십이 넘고 척 보기에도 운동으로 단련된 놈을 게다가 멋진 계집애 하나 달고 지나가는 젊은 놈에게 시비를 걸겠는가? 억지설정이다. 넌센스다. 이 영화는 보나마나 실패작이다. 단성사나 명보극장? 개 코나 뭐나 비디오로 나와도 십만 안 본다. 십만 이상 보면 내손에 장을 지진다. 그나저나 이런 허술한 영화에서 조연도 아닌 엑스트라 급으로 출연해서 먹고사는 내가 한심하기는 이 사람들보다 더하다. 나는 화가 치밀기 시작한다. 놈이 말한다.

"이손 놓는 게 어때? 다치기 전에 말이야."

"하하 이 녀석아, 내가 이손을 놓을 듯싶으냐?"

나도 놓고 싶다. 놓아야 한다. 안 그러면 이 녀석이 나를 다리 아래로 집어던질 것이다. 다리 아래는 물론 매트리스를 두껍게 깔아놓았지만 말이다. 갑자기 가슴에서 삐리릭 삐리릭 신호가 온다.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온다. 놈이 갑자기 나를 휙 다리 아래로 집어던진다.

 

"으악"

 

내가 떨어진 매트리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돌무더기 위에서 엄살을 피운다. 정말 여기 떨어졌다면 최소한 12주다, 아무리 잔잔바라에 도가 튼 무술가라해도,,,

"하하하"

놈이 다리위에서 내려다보고 웃는다.

"으 두고 보자."

 

비틀거리면서 도망을 치는데 아무래도 허리가 안 좋다.

"컷 오케이."

나는 노란 트레이닝 복을 벗고 핸드폰을 확인한다.

"그 장호원이 저의 고향인데 거기에서 하룻밤 묶으셨나요? 서울엔 비가 오는데,"

그렇구나. 님의 고향이 여기였구나. 늘 정갈함을 잃지 않는 한 여인의 메시지다. 내 역할이 끝났으므로 나는 메시지를 답한다. 음산히 흐린 하늘에서 이윽고 비가 내린다. 빗속에서 이어지는 강행군의 촬영. 촬영이 끝나자 열한시가 넘었다. 우리는 정해진 숙소로 들어간다. 일부는 노래방으로 가고 일부는 당구를 치러가고 나는 피시방으로 샌다. 나는 내가 가입한 외로운 영혼들아. 필사적으로 짝을 찾자. 라는 다음카페로 접속을 한다. 명목상으로는 외로운 솔로들의 모임이라 하여 이혼이나 사별 혹은 미혼 남녀들이 자유롭게 글을 올리고 번개나 정모를 가지기도 하며 자기네끼리 쪽지 질을 하여 개별적으로 만나기도 한다. 더러는 유부남 유부녀들이 미혼이나 이혼을 가장하고 들어와 놀다가기도 한다. 본래 취지는 만나서 결혼하는 건전한 모임이었지만 몇 년이 지나면서 타락한 삼류카페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초기에 건전한 생각으로 카페를 만들었던 운영자는 운영진의 모함에 밀려나고 이제는 공식적인 불륜의 온상이 되어 버렸다. 진즉에 탈퇴하고 싶었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아 이 카페에 이름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채팅신청이 뜬다. 프리티 걸이라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닉네임이다.

오빠 믿지 님 닉네임이 너무 재미있어요.”

나의 닉네임은 오빠 믿지, 이다. 뭔가 야한 뉘앙스가 풍긴다. 그걸 노린 거지,

프리티 걸이라고요? 걸은 좀 심하신 거 아닌가요?”

예능을 다큐로 받는 분이군요. 오빠를 믿기 어렵게 만드네요?”

그래도 믿어야죠. 오빠잖아요.”

하릴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몇 살이세요?"

이윽고 신분탐색이 시작된다.

"마흔 두 살입니다. 미혼이구요"

다 미혼이라고 하고 다 외롭다고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유부남이거나 그렇더군요. 댁은 정말 미혼에 마흔 두 살 총각이란 말이죠?”

제가 이래서 이 카페가 싫어집니다. 초창기에는 신분조회를 했어요. 운영진한테 주민등록 등본을 스캔해서 보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정회원이 되지를 못했어요.”

좀 심했다. 그죠?”

댁의 정보나 말해보시오.”

서른여섯의 이혼녀에요. 보험회사에 다니고 있죠.”

어차피 신상명세란 믿을 것이 못된다.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속는 사람만 바보이기 때문이다.

"전 벽돌을 나르러 왔습니다. 벽돌을 지고 나르는 직업이지요."

내말에 그녀가 웃는다.

"벽돌을 나른다고요? 하하하"

"네 노란벽돌이 더 무겁지요"

"힘은 좋겠군요."

"무식하고 힘센 이미지가 바로 오빠 믿지 의 컨셉입니다."

"어디세요?"

"장호원이라는 소읍입니다. 여기 왔거든요"

"................."

갑자기 한참의 정적이 이어진다.

"????"

일분이 지났다. 나는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저도 장호원입니다."

이번엔 내가 황당할 차례이다. 서른여섯의 보험회사에 다니는 이혼녀, 가 장호원 읍에 산다.

"만납시다."

이윽고 우리는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KT 전화국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떨리는 발길로 컴퓨터를 끄고 계산을 하고 담배를 한 대 피워물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걸어서 삼분 거리 빨리 나갈 필요가 없다. 오 분쯤 시간을 죽이다가 천천히 걸어갔다. 소요된 시간은 팔 분 정도 뭐 벌써 와있지는 않겠지.

 

한 여인이 있었다. 다소곳한 이미지였다.

"오빠 믿지 님?"

"."

날도 쌀쌀한데 술이나 한 잔 합시다.”

그럽시다.”

우리는 포장마차로 갔다. 얼마나 퍼 마셨던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던가,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텅 빈 머릿속으로 수많은 새떼가 날아갈 뿐이었다. 빈속에 마셔댄 술 때문이다. 내일의 촬영은 잊었다. 잘리면 벽돌이나 나르지 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길가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마시고 있었다.

"가셔야죠?"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물었다.

"쉬고 싶어요"

그녀가 모텔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찬찬히 뜯어보니 제법 생긴 미인이다. 일이 이상하게 꼬여간다. 난 결코 방탕한 인간이 아닌데 날 내버려 두지 않는다. 모텔비를 지불하고 들어간 내가 먼저 샤워실로 들어간다. 찬물로 정신을 차린다. 정신 차려라 설태희 무엇하는 짓이냐, 몸을 다 씻고 나왔을 때 여자는 침대 속에 있었다. 그리고 살짝 이불을 들쳐보였다. 형광등의 불빛이 매끄럽게 반사되는 알몸이었다.

"어서 들어와요"

그러나 나는 들어가는 대신 담배를 피워 물고 탁자에 앉았다.

"어서 와요"

여자가 다시 애원하듯 말했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문이 잠겨있나? 문이 잠겨있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다. 분명 잠기는 문이다. 들어오면 삐리릭 소리와 함께 잠기는 문이다. 그런데 전원 스위치가 죽어있다. 이건 함정이다. 나는 웃었다. 큰 소리로 웃었다. 여자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 가슴이 좋아. 우와, 피부가 탱탱한데 말이야. 서른여섯 아니지? 스물일곱이지?”

문이 벌컥 열리고 덩치가 커다란 사내하나가 뛰어들었다.

"언놈하고 바람났나 했더니?"

사내는 침대를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란다. 침대에 엉켜 있어야 할 남녀가 보이지 않고 여자만 있는 것이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탁자에서 일어나면서 사내를 향해 담배 한 모금을 내 뱉었다. 사내의 손에는 시퍼런 식칼 하나가 들려있다. 무식하게 식칼이라니, 사내는 망설이다가 여자에게 달려가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혼자 보긴 아깝다. 쇼는 너희들끼리 해라.”

슬쩍 빠져나가려고 문 쪽으로 걸었다. 사내가 머리채를 풀더니 내게로 달려들었다. 사내가 내 옷을 잡아 돌려세웠다.

"이 말끔하게 생긴 놈아"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남의 마누라랑 놀아났으니 개망신을 한번 당해야지? 당신 마누라 전화번호 대봐.“

놈이 나를 보면서 싱긋이 웃었다. 빠진 이빨이 흉물스러워 보였다. 나는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웃어? 허파에 바람을 빼주랴?"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바람이나 피우는 마누라를 왜 키우겠어. 난 그런 거 안 키운다.”

사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마누라 없다고 내 마누라랑 떡을 치는 거야? 몇 번이나 만난거지?”

식칼을 흔든다. 시퍼렇게 흔들리는 식칼의 날에 번쩍하고 반사되는 빛이 보인다.

언제 읽었더라? 칼에는 눈이 없다.

"용서해주세요, 사실 이 남자랑은 오늘이 첫날이에요"

여자가 옷을 대충 꿰어 입고 달려와 나를 잡고 말한다.

"경찰서로 가자"

놈이 나를 끌고 나선다.

"경찰서 좋죠. 갑시다."

내가 말하자,

"몇 군데 쑤셔놓고 시작해야겠군, 이 미친놈아"

사내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슬쩍 숙인 머리위로 날아가는 칼날이 바람소리를 냈다. 덩치에 비해 몸이 빨랐다. 머리를 숙여 피하면서 발뒤꿈치로 놈의 발등을 찍었다. 아흑, 놈이 비틀거리면서 흔들렸다. 돌려차기로 칼을 차버렸다. 이런, 칼날의 옆을 차야 하는데 놈이 살짝 돌리는 바람에 칼날을 차버렸다. 발뒤꿈치가 베인듯하다. 녀석이 주저앉는다. 나는 주저앉는 놈의 턱을 발로 차버렸다. 이빨이 나가든 말든, 나도 기분이 무척 나빠져 있었다. 놈이 바닥을 뒹굴면서 고통스러워 할 때 나는 여자에게 다가가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너 꽃뱀이지?"

"놔 이 새끼야"

"이 썩을 년이"

나는 여자의 뺨을 후려 갈렸다. 여자가 비틀거리면서 주저앉았다. 으윽 하고 일어난 남자가 식칼을 들었다.

"너 죽고 나죽자 이 18놈아"

으스스 돋는 한기, 저 눈 없는 칼에 찔리면 이 설태희의 운명도 이 시들시들한 삶도 끝나겠군. 여기서 죽고 싶지만 이건 너무 불명예다. 나는 허공을 날아 공중회전돌려차기로 놈의 칼을 차버렸다. 그리고 돌아서 나왔다. 주저앉아 통곡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건달이란 놈이 허여멀끔한 놈 하나 당하지 못해? 엉엉"

"아파죽겠다 이 썩을 년아 남자 좀 잘 고르지 그랬어, 내가 볼 때 저 새끼는 무술 하는 놈이야. 몸이 엄청나게 빨라."

발뒤꿈치가 엄청나게 쓰라리면서 아파오기 시작했다. 바라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응급약을 가지고 다니니까 돌아가서 치료하면 될 것이다. 만약 상처가 깊다면 내일 그냥 올라가야 할 것이다. 다친 몸으로 잔잔바라를 찍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 세상은 살기 싫어."

나는 흠칫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새 술기운은 가셔있었다. 자꾸만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일 촬영은 다른 사람이 맡아야 할 것이다.

형님, 이제 늙었어요. 그만 나오셔도 됩니다. 다른 애들한테도 기회를 주셔야죠.”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마흔 넘어서까지 이런 일을 하기엔 벅차긴 하다. 그나저나 우리 모텔 204호라고 했었지? 나는 기억을 더듬으면서 숙소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뎅뎅하고 교회종소리가 들렸다. 내 지난한 한살이가 이리도 한심하단 말인가? 정말 살기 싫어지는 구나. 모텔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설 때 나는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시 들어서려니 태희야 하는 묵직한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희끗희끗하던 하늘에서 무언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꼬릿글 쓰기
FIDES |  2013-04-23 오전 10:20:2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으음...멍청한 아마추어 꽃뱀이군요!!!

함박눈이겠죠? 함박눈은 마음을 정화시키는 묘한 힘이 있군요.^^  
철권미나 |  2013-04-23 오후 6:37:0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보름달이 떳군.  
철권미나 벚곷이 지더니..
팔공선달 |  2013-04-24 오후 5:07:3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첫눈 세상을 바꾸죠. 일시적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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