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기객

밤새도록 민박집 창문을 통해서 바다를 보았다. 바다를 보다가 미친 듯이 달려 나가 바닷가를 달려보다가 그러다가 바닷가에서 지퍼를 내리고 바다를 향해 소변을 보았다. 들끓는 심화. 회한의 세월. 어떻게 지난 일 년을 죽지 않고 견디었는지 내가 생각해도 정말 대견할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다시 민박집으로 들어와서 배낭 속에 있던 소주를 한 병 다 불어대고야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배낭을 들고 다시 역전으로 향했다. 어제저녁 내렸을 때 보아두었던 빈삼각기원으로 갈 예정이었다. 빈삼각기원. 여기에 점박이 노인이라는 내기에 환장한 노인네가 있단다. 목표는 점박이 노인이었다. 오전 열한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나 유랑기객. 강풍허. 사업에 부도를 내고 도망 중. 한때 기업인 바둑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음. 프로만 아니라면 호선으로 누구라도 내기를 자신함. 아마추어국수를 지낸 하성봉씨나 아마패왕전을 삼 회 연속 우승한 김재준씨나 아마추어중 적수가 없다는 기원원장님이나 모두 나에겐 삼할 승률로 만족 할 정도, 한때 프로기사가 되려고 입산하여 일 년간 바둑공부에 전념한 적이 있음 한때 중국바둑사이트에 飛虎라는 아이디로 무패가도를 달린 적이 있음 그게 나 유랑기객 강풍허 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름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음 흐흐흐.

“몇 급 두십니까?”

대머리가 벗겨진 원장이 다가와서 물었다.

“일급입니다. 가볍게 만원 빵 내기를 했으면 합니다. ”

안색이 변하는 원장. 그렇다. 기원에서 일급이라고 말하면서 내기를 하자는 사람이라면 원장은 알 것이다. ㅎㅎ 요 근래 일 년간 전국을 떠돌며 내기로 살아가는 거의 무패가도를 달리는 나 유랑기객 강풍허... 나는 오만하게 기원 안을 살펴보았다. 저쪽에서 두고 있는 팀들은 끽해야 이 삼 급 수준이고 저쪽은 하수들이고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한 젊은 사내가 눈에 들어온다. 스물일곱 정도 파리한 안색에 도 수 높은 안경을 끼고 바둑을 두지는 않고 바둑책을 혼자 보고 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한수하시렵니까?”

“그럽시다.”

“돌을 가리죠?”

“그래요.”

몇 급이냐고 묻지도 않는다. 정상급이라는 이야기다.

“만 원 짜리 하죠, 가볍게?”

“좋죠.”

사내가 지갑에서 만원자리를 꺼내 바둑판 밑에 묻는다. 나 또한 묻는다. 돌을 가리니 내가 백번. 사내가 우상화점에 놓고 담배를 피워 문다. 내가 좌하화점에 놓자 사내가 나를 건네다 보고 묻는다.

“혹시 점박이노인을 아십니까? ”

“모릅니다. 전 여기 첨이라서.”

“아 네, 오늘쯤 온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점박이노인. 내가 암중모색하던 상대. 상대를 모르는 척 내기를 두려고 온 것인데 이자도 나처럼 점박이노인을 꺾으려고 온 것일까? 이쪽 지역에서는 강호로 알려져 있고 내기가 아니면 두지를 않는 점박이노인을 만나려는 사내. 하지만 난 시치미를 떼고 그냥 바둑에 열중했다. 중반까지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역시 사내는 일급이라 할만하다. 그때 기원문이 열리고 이마에 검은 점이 박힌 육 십 대의 노인이 들어온다. 바둑알을 놓는 사내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어차피 그나나나 최선을 다해두지 않았음을 서로 알고 있다. 하지만 묘하게 균형을 맞추면서 서로가 판이 커지기를 기다리면서 탐색전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사내가 갑자기,

“제가 부족하군요.”

하면서 돌을 거두고는 점박이 노인에게 다가갔다. 나는 어정쩡하게 만 원짜리를 챙겨 넣고 사내를 따라갔다.

“점박이 어르신 한수 하시겠습니까?”

“누구시더라?”

“일 년 전 부천 송내 기원을 기억하십니까?”

“아하 그때 그 젊은이? 그런데 부천에서 여기까지 나를 찾아왔는가?”

“제가 찾아온다고 안했습니까?”

“하하 정말 찾아올 줄이야? 이번엔 얼마짜리로 할 텐가?”

“그때의 열배로 합시다.”

점박이노인의 얼굴에 홍조가 띈다. 재미있다. 난 졸지에 재미있는 판을 구경하게 된 것이다.

“장소를 옮길까요?”

“그럽시다.”

“심판이 필요할 텐데 제가 봐드리죠, 대신 뽀찌는 있는 겁니다.”

“당연하죠.”

(뽀찌란 구경꾼에게 주는 십분의 일, 술이나 마시라고 주는 개평) 사내와 점박이 노인이 일어서서 나가고 나도 어정쩡 따라 나간다. 점박이 노인은 그냥 나가고 젊은이가 내 기료까지 낸다.

“순대나 채우고 하죠?”

“그럽시다.”

노인과 나와 젊은이가 가볍게 자장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우리는 여관으로 들었다. 여관으로 들어간 노인이 전화를 하자 잠시 후 그럴듯한 바둑판을 가지고 한 젊은이가 찾아들었다.

“오늘도 내기에요?”

“응”

“할아버지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알았다.”

젊은이가 가고 한적한 여관방에 바둑판이 차려졌다. 시간은 오후두시 젊은이가 주머니에서 천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었다. 그러자 점박이 노인도 수표를 꺼낸다. 두 사람의 수표를 받아서 바둑판 밑으로 밀어 넣는다.

“돌을 가리시죠.”

내말에 노인이 돌을 쥔다. 흑돌 하나를 가볍게 올려놓는 젊은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여관방 바깥으로 눈이 시도록 푸른 바다. 열네 개. 노인의 흑번. 돌을 바꾸고 서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 노인의 첫수가 우상귀 화점에 놓인다. 아 지겨운 화점. 그러나 화점만큼 안전하고 위엄 있고 기세등등한 수는 없다. 아주 느린 템포로 바둑이 진행된다. 한판에 천 만 원 짜리. 내가 둔 다해도 자신이 없을 정도의 고수들이다. 둘 다 프로랑 정선에 질 자신이 없을 정도의 실력이다. 졸린다. 나는 창문밖에 펼쳐진 바다를 본다. 오후 다섯 시. 삼십 여 수 진행. 오후 일곱 시. 칠십 수 진행 응창기배보다도 국수전보다도 느리게 진행된다. 제한시간도 없고 오로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그러나 바둑판에는 긴장감이 돈다. 젊은이의 가벼운 응수타진. 삼십분 장고한 노인이 가볍게 비튼다. 다시 젊은이의 하염없는 장고.150수가 진행되었을 때 열두시를 친다. 자정이다.

“자장면이라도 시켜드릴까요?”

두 사람 다 대답이 없다.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젊은이가 빙긋이 웃고는 고개를 가로로 흔든다. 나는 구경꾼답게 천천히 방을 나가서 마트에 들려서 빵과 우유를 사먹고 방에 들어왔다. 여전히 변함없는 바둑판. 수십 번 계가를 해도 도무지 모르겠다. 귀에서 사활패가 걸렸다. 그때 시간이 새벽 세시. 노인의 백돌이 사활에 걸리고 가볍게 두 점 단수 친 돌을 불청하고 패를 해소하자 젊은이가 두 돌을 따내고 비로소 명암이 드러난다. 한집반의 우세 백승 유력. 확인하고 또 하고 하면서 다지듯 판을 조이는 젊은이 마지막 반패를 양보하니 젊은이의 반집승. 아침 일곱 시 나도 내기에 숙달이 되었고 큰 내기도 더러 해봤지만 이처럼 장엄한 승부를 본적이 없었다.

“내가 부족하군.”

점박이 노인이 계가를 마치고 일어선다.

“먼저 가겠소.”

젊은이가 탈진한 듯이 벽에 기대어 고개만 까딱거린다.

“참 대단한 승부였소이다.”

내가 말하자 젊은이가 비로소 입을 연다.

“일 년 전이었소. 난 그때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그날은 마침 회사 창립기념일이라 가까운 기원에 들렀지요. 그런데 한 노인이 있었어요. 점박이 노인이었죠. 경주가 고향인데 서울아들 집에 들렀다가 시간이 남아 바둑 두러 왔노라고 했어요. 내가 일급이라 하자 그 노인역시 일급이라 했소, 만 원짜리를 둬서 내가 이겼소. 그러자 노인이 말했소, 젊은이는 원래 내겐 석 점정도 치수요, 뭐라고요? 내가 화를 내자 노인이 다시 말했소, 백만 원을 건다면 석 점 접어주겠소. 난 화가 났소, 그래서 백 만 원에 호선으로 하자했고 결국 패했소.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지만 백수를 넘기지 못하고 불계패를 당했어요. 그때 노인이 말했소. 내가 석 점 치수라고 하지 않았소. 왜 내말을 못 믿는 거요? 좋아요. 석 점으로 백만 원 어떻소? 이제야 내기다운 내기가 되겠군. 그래도 불리할 거요. 노인의 비아냥거리는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지만 석 점 에서도 패했어요. 결국 그날 구렁이알 같은 200만원을 눈앞에서 날렸습니다. 억울하면 경주의 빈삼각기원으로 찾아오세요. 수표 두 장을 곱게 접어서 지갑에 챙겨 넣으면서 노인이 말했어요. 난 앉아서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절망하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그날이후로 며칠간 결근하다가 직장을 그만뒀소. 현현기경 관자보 기경중묘 이창호 선국 집 유창혁 선국 집. 난 육 개월 간 바둑공부만 했소. 집에서 미친놈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요. 너무 억울했기 때문에 그리고 일 년간 프로에게 대국료를 주면서 지도를 받았어요. 퇴직금을 몽땅 쏟아 부은 거지요. 양재호 구단에게 호선으로 육 할 승부가 나온 게 한 달 전이었소. 난 몇 군데 기원을 다니면서 실전대국을 펼치면서 승부호흡을 가다듬다가 여기 경주의 빈삼각으로 찾아왔죠, 오늘이 삼 일째였어요, 기다릴 때 당신을 만난거지요. 당신바둑도 장난이 아니던데요. 하지만 당신하고 승부를 가릴 여력이 남아있질 않아요, 전 지금 몹시 허탈해요.“

젊은이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지갑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천만 원짜리 내기바둑이었으니 십분의 일을 준 것이었다.

“뽀찌요.”

“고맙소.”

난 수표를 받아들고 여관을 나섰다.

“언제 한 번 나랑 둡시다. 좋은 승부가 될 거 같군요. 그런데 혹시 강풍허라는 분이 아니세요? 소문이 자자하던데,“

“맞습니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고 실력은 대단치 않소이다.”

“겸손도 지나치면 실례랍니다. 하하하.”

내가 쓴 웃음을 날리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댁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 느낌이 오더이다. 점박이 노인을 깨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더니 왜 이리 허탈한지 모르겠소. 날 부축해주겠소? 나가서 쓴 소주 나 한잔합시다.”

나는 젊은이를 부축했다. 그리고 승부의 무상함에 치를 떨었다.

“다 불쌍하지요 나나 아저씨나 승부란 게 본래 허탈하지만요.”

“언제 한 번 나랑 둡시다.”

내가 말하자 젊은이가 대꾸했다.

“그럽시다. 아주 좋은 승부가 될 거 같군요.”

해가중천에 떠있었다. 나는 찡그리면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틀 정도는 바둑을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밤새도록 지켜본 대국을 복기검토하면서 그 바둑의 기보를 짜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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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이거 창작입니다.^^ 본의 아니게 이름이 도용되신 유명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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