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술이 덜 깬 목소리로 받는다.

"민정기씨 댁입니까?"

"예 제가 민정기입니다만..."

"짜식 목소리 깔아서 잘못 건 줄 알았잖아 나 승우야"

"아 승우 형. 그런데 승우 형이 웬일이야?"

"운전 좀 해주라"

"운전?"

"영월로 동굴탐사를 가야 하는데 내가 며칠 전에 왼손을 다쳤어, 넘어지면서 땅을 짚었는데 뼈에 금이 갔대. 지금 기브스를 하고 있다. 며칠 전에 예약해 놓은 일이라 취소도 안 되고 부탁한다, 정기야,"

"나 이혼하고 나서 두문불출 하는 거 알잖아 형이 다른데 좀 알아봐"

"네놈 신세 안 지려고 여러 군데 알아봤는데, 없어"

"오늘이야?"

"아침 열시까지 사당역으로 와라. 우리 와이프가 거기까지는 실어다 주겠단다. 참 그리고 아리따운 여자 둘이 동행하니깐 기대해, 흐흐흐."

선배가 음흉스럽게 웃었다. 아리따운 여자라. 일 년 전 바람난 아내와 헤어지고 나는 오랫동안 방안에서 혼자 지냈다. 오랜 티격태격 끝에 이혼을 하고나서 나는 곧바로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는 곧바로 칩거에 들어갔다. 면도도 하지 않고 티브이도 보지 않고 방안에 있는 책들을 한쪽 구석에 모조리 쌓아놓고는 한 권 한 권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반 이상을 읽었을 때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라면과 소주와 독서. 이 세 가지로 나의 일 년은 지나간 것이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랬는데 갑자기 이 평화스러운 공간으로 선배가 침입한 것이다.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 스킨을 바르고 향수까지 뿌리고 거울을 보니 제법 멋진 녀석이

서있었다.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자 막 떠오르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한참을 찌그리고 있다가 주차장에 먼지와 얼룩을 잔뜩 뒤집어쓴 나의 애마 소나타 투를 본다. 모든 기관들이 녹슬지는 않은 건지 몰라. 혹시나 기름도 다 날아가 버렸을지 모르지. 칩거라 일 년 만의 외출이라, 하지만 너는 더 기다려야 한다. 나는 전철을 타고 갈 작정이다.

화곡역에서 전철을 타고 사당역에 내렸을 때는 열시 오 분이 지나있었다.

"이쪽이야"

두리번거릴 때 선배가 기브스 한 팔을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형수는?"

"갔어, 염병할 년 바쁘다고 아홉시 십 분에 여기 데려다 놓고는 총알같이 내빼는 거 있지."

아내를 염병할 년이라고 욕하는 선배지만 있는 자리에선 꼼짝도 못 한다. 하지만 아내가 없으면 큰소리친다. 나는 차에 올라서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하면서 경쾌한 떨림이 전해온다. 근육으로 잘 다져진 운동선수 같은 겔로퍼를 채찍질 한다.

"신갈 쪽으로 빠져라, 신갈 인터체인지에서 동행 두 명이 탄다."

"정말 여자야?"

"야 내가 언제 식은 밥 먹고 헛소리하던 이 선배 말을 믿어라."

일요일아침 도로는 텅텅 비어있고 햇살은 청량하다. 이미 여름은 끝나가고 알맞게 시원한 바람, 나는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워 문다. 신갈에서 정말 어여쁜 여자 두 명이 동승했다. 뒷좌석에 앉는 여자는 선배의 조교란다. 참 선배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다. 나보다 십년이 연상이지만 난 친구처럼 편하게 대충말도 트면서 지내고 선배는 그런 나를 아주 귀엽고 착하고 말 잘 듣는 후배로 본다. 실제로 선배가 어려울 때면 나는 선배를 돕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일 년 동안 칩거하던 나를 불러낸 건 선배의 끈끈한 인간미와 격의 없는 인품이다.

"전 장소영 기자에요, 삼척동굴박람회가 예상외로 흥행에 성공하자 우리 썬 파워우먼에서 특집으로 동굴탐사라는 페이지를 할애했어요. 장장 십여 페이지를 할애했고 난 그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려고 선배와 동승하는 겁니다. 그런데 댁은 운전기사에요.?"

머리를 시원하게 뒤로 묶은 늘씬한 몸매와 거침없는 말솜씨의 여자가 내 옆 좌석에 앉으면서 한말이었다.

"..........."

내가 침묵하자 뒷좌석으로 타던 다른 여자가 말햇다.

"난 교수님의 조교에요, 동굴생태학을 연구하는 교수님의 연구에 동참할 겸 또 사진도 찍고 교수님이 손목이 부러지는 바람에 제가 이 영광스런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지요, 기사님 잘 부탁합니다."

"............"

"인사해 인마, 숙녀 분들에게 자기소개를 해야지,"

선배의 재촉에 망설이던 내가 입을 열었다.

"마누라하고 이혼하고 일 년 간 칩거 하고 있다가 오늘 선배님의 기사로 차출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두 분 숙녀 분을 모실 수 있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말을 마치고 나는 다시 출발했다.

"나이는요?"

"서른일곱입니다."

"전공은?"

"잡지사 편집장으로 있었습니다."

"잡지사 이름은요?"

"현대 여성"

"아 우리 라이벌 회사네?"

"이혼 사유는?"

"그만 하시죠 기자양반"

나는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차가 영월군 쌍용면 토우리에 도착한 것은 두시 반이었다. 우리는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그냥 쭉 왔으므로 시간이 단축된 셈이었다. 선배의 손끝으로 이리저리 차를 몰다가 비포장도로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모두 내렷다.

"여기부터는 걸어가야 해, 저기 보이는 저산을 넘어서 가면 망태산이 있고 거기 상피동굴이 우리가 오늘 탐사해야 할 곳이지. 내일은 삼척의 관음동굴 모래는 제주로 넘어가서 용천동굴, 이러면 일정 끝 여러분과 나는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죠"

짐이 많았다. 선배는 다쳤다는 핑계로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잡지사 여기자는 역시 카메라에 취재노트만 달랑 들고 조교와 나만 배낭과 탐사 장비를 둘러메고 산으로 올라갔다. 길은 험했다. 땀이 비오 듯했고 선배는 다친 팔 때문에 무척 불편해 했다. 세 시간을 헤맨 끝에 우리는 상피동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저기가 상피동굴이야, 옛날에 나물을 캐러왔던 누이와 나무를 하러 왔던 오빠가 저 동굴 속에서 비를 피하다가 상피를 붙었다는 거지, 상피란 성교를 뜻하는 거야, 비가 그치고 오빠는 죄책감에 저기 절벽 아래로 몸을 날리고 누이는 저 소나무에 목을 매었다지, 그래서 이 동굴이름이 상피 동굴 인 게야"

여기자가 불쑥 한마디 던진다.

“달래나보지 전설과 비슷하네요? 하여튼 옛날 사람들 상상력 부재는 끝내준다니까 설화만 봐도 동서양이 비스무리하고,”

산에는 해가 일찍 진다. 이미 여섯시 가까운 시간인데 울창한 나무숲 때문에 금방이라도 깜깜해질듯 하다.

"우선 여기다 얼른 텐트를 치고 저녁은 라면을 끓여먹읍시다. 동굴탐사는 내일 일찍 하기로 하고 자 정기야 얼른 텐트부터 쳐라"

텐트는 칠 팔 인용으로 컸다. 하지만 한군데서 여자남자 같이 자기도 그렇고 난감했다. 우리는 산의 제법 넓은 공터에 나무를 모아 불을 지피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두툼한 잠바 하나씩 걸치고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마침 둥 뚜렷이 달이 떠올랐다. 보름달이었다.

"염병할 이렇게 분위기 죽이는데 노래 한 자락 빠질 수 있어?"

선배가 말했고 선배의 배낭 속에서 나온 소주 펫트 병을 서로 번갈아 병나발 불었다. 여기자가 김현정의 멍을 유창한 솜씨로 안무까지 곁들이면서 불렀고 조교는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역시 애교어린 목소리로 불렀고 선배는 선구자를 유창하게 불렀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노래를 시작했다.

" 산 산 산 산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들들들 들에는 곡식들이 자란다.

......

무럭무럭 자란다. 시시때때 자란다. 우리나라가 자란다."

썰렁했다. 나는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에 전율했다. 그렇게 썰렁하게 자리가 깨지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한쪽구석엔 선배와 내가 다른 구석엔 조교와 기자가 서로 발바닥 쪽으로 향해 잠이 들었다. 워낙 피곤했으므로 에로티시즘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잠시 후 선배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고 조교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나도 코를 골았다.

"일어나라, 게으른 자의 집에는 가난이 군병처럼 몰려오나니,"

날카로운 째지는 목소리에 일어나니 조교가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아침을 대충 때우고 우리는 장비를 갖추고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랜턴과 장화 그리고 두꺼운 옷, 선배의 텐트 속에는 이미 네 사람분의 그런 것들이 준비되어있었다. 염병할 어쩐지 무척 무겁더라니, 철버덕 철버덕 장화 밑으로 물이 흐르고 랜턴의 불빛이 지나가는 곳으로 푸드덕푸드덕 박쥐가 날았다. 기자는 연해서 플래시를 터뜨렸고 조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박쥐가 여우박쥐야, 생긴 게 여우같잖아"

"아니요, 서양영화에 나오는 악마 같은데요?"

조교가 말하자 선배가 다시 답한다.

"악마의 이미지를 박쥐에서 따온 거야, 서양 사람들은 박쥐를 보면서

아마 악마의 생김새를 추측해 냈겠지,"

동굴은 의외로 짧았다. 이리저리 랜턴을 비추다가 나는 갑자기 한곳에서 후레쉬를 멈추었다. 연한 버섯이 눈에 들어왔다. 버섯근처에는 다른 풀들이 있었는데 묘하게도 풀들은 투명했다. 눅눅한 습기를 머금고 있는 듯 했다. 다시 랜턴의 불빛을 위로 올려보니 사마귀가 눈에 들어왔다. 사마귀역시 투명했다. 내장이 들여다보였고 아주 맑다는 그렇지만 징그럽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형 저건 뭐야?"

급하면 선배님소리보단 형 소리가 먼저 나온다.

"저건 음지식물이라는 거야, 위에 것은 음지동물이고 저것들은 동굴 속에만 서식하지, 햇빛을 보면 녹아버리지. 아마 구십팔 퍼센트 이상이 수분일거야, 사마귀나 버섯이나, 그리고 개미 중에 눈의 기능이 퇴화되어버린 장님개미도 있다지. 지하 2km에서 살다보니까 눈은 장식품에 불과해서 없어져 버린 거지. 사람에게 있는 꼬리뼈처럼 말이야.“

아 아, 나는 머리를 감싸면서 주저앉았다. 그것은 나였다. 어둠속에서 내내 칩거하는 동안 나는 저 음지식물처럼 습기만 가득하고 햇빛에 대한 면역력을 읽어버리고 아마 곧 녹아버리겠지, 선배가 나가고 조교가 나가고 내가 나가고 그런데 잡지사 여기자가 나오지 않았다.

"사고가 생겼는지 모른다. 정기야 얼른 들어가 봐라."

선배의 말에 나는 다시 동굴 속으로 향했다. 깜깜한 어둠, 나는 랜턴으로 여기저기 비추었다.

주머니를 뒤져서 담배를 꺼내고 라이터를 켜려다가 문득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동굴 속에는 천연가스가 생성되었을 수도 있으니 화기를 발생시키지 말 것, 안에서 흑흑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기자님이세요?"

내가 랜턴을 비추자 거기 여기자가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랜턴 좀 꺼줄래요?"

내가 랜턴을 끄자 기자가 말했다.

"그냥 눈물이 막 나오네요, 실컷 울고 나가려고 했는데."

나는 손을 내밀어 기자의 손을 잡았다. 기자는 거부하지 않았다. 나는 랜턴을 켜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추워요"

"추워도 참아요. 곧 나가요 한 10분 정도만 걸으면 도착합니다."

"잠깐만요"

"?"

"랜턴 좀 꺼줄래요? 그리고 무서우니까 멀리가지 말아요.“

“왜 그러시는지?”

“좀 맹한 구석이 있으시죠? 그러니까 이혼을 당하지.”

싸가지가 없어도 너무 없다. 하지만 이 어둠속에서 그녀와 티격태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랜턴을 끄자 어둠속에서 부스럭거리면서 옷 벗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쏴아 하는 소리 참 폭포수 같네. 그리고 다시 부스럭거리면서 바지 올리는 소리, 나는 벽에 붙어서 가만히 있었다.

“이봐요? 어? 간 거 에요? 멀리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는 가만히 있었다. 정말 짜증스러운 그녀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아이 진짜 나쁜 남자네. 착해 보여서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삐지기나 하고, 도대체 나는 어쩌라고,”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랜턴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얼른 랜턴을 켰다.

“여기에요.”

여자가 다가왔다. 나는 여자의 얼굴로 랜턴을 비추었다. 눈물이 함부로 흘러내려서 아이 라인이 보기 흉하게 얼룩 져 있었다.

“장난이나 치고 놀랐잖아요.”

여자가 나를 덥석 안았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일분쯤 그러고 있었다. 여자의 모든 마음이 이해되는 것처럼 마음이 넓어졌다. 그리고 편안해졌다. 여자가 팔을 풀었다.

“미안해요.”

내가 말했지만 대꾸도 없었다. 앞장을 섰다. 우리가 동굴에서 빠져나가자 선배와 조교가 근심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도 안 나와서 상피 붙는 줄 알았잖아"

선배의 거친 농담에,

"하이고 전 새파란 젊음인데 저런 이혼남이랑 무슨 상피를 붙어요? 그리고 상피라는 말의 뜻은 해서는 안 되는 친척이 그러는 걸 말하지요. 근친상간의 개념인데 난 저 이혼남하고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상피가 아니라 그냥 섹스죠.“

“자꾸 이혼남, 이혼남 하지 말아요. 듣는 이혼남이 기분이 나빠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녹아내리지 않았다. 살아가야지, 저 음지식물처럼 음지동물처럼 동굴 속에서 살다가 아주 오래 오래 살다가 정말 햇살에 녹아내리면 안 된다. 서울로 돌아가면 정말 다시 살아갈 것이다. 저 여기자처럼 동굴 속에서 한번 울고 그리고 오줌이나 한번 갈기면 되는 거다. 살아가야지.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망이 가득 찬 하늘.

“둘이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시간상으로는 충분한데? 정기 너는 오 분 이면 충분하잖아.”

“형, 왜 그래? 나 원래 삼분짜린데 그래서 이혼당한 거잖아. 어째서 이분이나 보태시는 거냐고,”

그때 그녀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럴 용기나 있으신가? 꽁생원처럼 생겨가지고,”

나는 그녀를 보면서 대답했다.

“왜요? 무척 아쉬워요? 다시 들어갈까요?”

그녀가 대답했다.

“살면서 기회가 그렇게 자주 오는 건 아닙니다. 민정기씨.”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생각에는 그런 기회가 가까운 시일 내로 또 올 것 같다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강렬한 햇살아래 녹아내리지 않는 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나도 오래도록 지하에 있었지만 눈의 기능은 여전히 살아있다. 강렬한 햇살에 눈을 찡그리자 그녀가 말했다.

“어? 지금 나한테 윙크하는 거 에요?”

자극적이고 짜증나는 스타일, 나는 속으로 지랄, 이라고 중얼거렸다. 만약 소리를 내어 말한다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실제로는 망태산도 없고 토우리도 없음. 이 글속에 나오는 것들은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