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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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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
2020-09-20 오전 11:46 조회 2225추천 10   프린트스크랩
▲ (__)

첫사랑.

모두의 감성에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이 붓 하나 들게 하고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가장 먼저 황순원의 소나기를 맞게 하고 바보들의 행진을 떠올리며

완행열차를 타고 바다로 바다로 고래 잡으러 간다.

낙엽 뒹구는 캠퍼스 오솔길

버드나무 휘늘어진 연못가에 앉은 이름 모를 소녀.

 

어느 날 보았던 중국의 한 젊은이의 애틋한 사랑에 눈물 한줄기 흘리고

가슴을 파고드는 죄책감에 자판을 당긴다.

그 중국 젊은이는 약혼자가 유방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자

약혼자가 검색하고 주문하려던 웨딩드레스를 수의 대신 입히고

장례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유튜브가 난무하며 가식적이고 어리석을 정도의 무리한 알리기 폐단에

부정적인 마음으로 바라보았지만.

진실은 기획이나 가식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다

나는 내가 눈물 흘린 걸 무죄라 말한다.

 

 

 

 

 

선생님도 사랑했고 초딩 발표회 때 선생님께 장가가고 싶다고 용기 냈다가

한 일주일쯤 부끄러워 학교도 못 갔고

친구 누나도 짝사랑했었고 옆집 순이도 너무 좋아서 그 골목길을 왔다갔다 하며

송창식의 맨 처음 고백을 수천 번도 더 불렀었다.

울산 태화교를 친구와 어깨동무하며 소주병 들고 고래고래 소리도 질렀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 울산 태화교 밑을.....”

둘 다 좋아했던 여자애가 갑자기 이사를 가버렸기 때문에 갑자기 전우가 되어.

 

그 중국 친구가 평생의 첫사랑 중에 지금도 후회하고 그리운 사랑하나.

그 한 페이지를 올리게 한다.

40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전할 수도 없는 마음을 올리게 한다.

꼭 한번 보고 싶다

20 갓 넘어 만난 첫사랑 40년이 넘어 만나면 어떨까.?

어쩌면 구설수에 면책권이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더한 구설수의 빌미도 되겠지만.

 

중학교 시절 시골에서 지명을 밝혀도 문제없을 것 같아 올린다

자인 중학교 전교에서 30등 정도 반에서 5위권 정도의 수준인데

대학교 보낼 능력이 안 되니 실업계로 가서 던 벌어 오라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당시 떨어지면 인문계 가는 실업계(공고)를 들어갔었다.

 

3년의 시간에 회의를 느꼈고 나보다 아니 선생님이 만들어 준 방과 후 스쿨에서

나에게 개인지도 받던 친구들이 대학 뱃지를 달고 다니면서 캠퍼스를 누비고

음악다방에서 사색에 젖고 팝과 여자 친구들과 허물없이 다녀도 멋스럽고

목로주점 학사주점에서 똑같은 막걸리를 마셔도 그들은 철학을 논하고

나는 일당을 생각했다

기타야 먼저 배웠으니 부러울 게 없었지만 동아리니 뭐니 하고 다니는 게

너무 부러웠다.

 

3학년 초

지금은 없어졌지만 성서 동국무역 내 모 섬유회사에 우수생으로 선 취업했다.

여공들이 90%인 현장은 10대 말년엔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대부분 중딩 이하에 고딩은 인텔리였고 사교성에 반반한 외모로 군계일학.?

그리고 기술도 빨리 습득하여 견습인데 6개월 만에 정직원이 되었다.

3개월 견습에 3개월 연장 회사가 선택하지 않으면 등교해야 했는데

이건 뭐 자유도 이런 자유가 없었다.

 

꽃밭에 앉아도 누워도 천정에도 꽃잎이 휘날렸고 누나도 생기고 동생도 생기고

너무 그러다 사장에게 불려가 호되게 야단맞고 홧김에 사표를 던지고 나왔지만

여러 증인들의 성실성과 재능에 복귀 권고에도 혈기로 마다했다.

그리고 그녀가 찾아 왔다

당시는 요즘과 달라 지인을 찾기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어떻게 찾았는지.

아마 회사에서 누군가 도움을 줬겠지만 당사자는 명분이 쉽지 않았을텐데.

 

그녀는 회사에서 최고 미인으로 꼽히는 사람이었고 내가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포기했었는데.

살다 보면 절실함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보다 무너졌다 다시 나타나는 그 감동

그것을 표현할 단어 나는 언감생심이고 인용도 못 하겠다.

드라마처럼 마주쳤는데 드라마처럼 격하게 껴안지는 못했다

마침 엄니가 오셨고 바라만 보던 우리의 정적은 거기서 끝났다.

누고.?”

나는 암말도 못했고 살짝 고개만 숙인 그녀를 엄니는 손을 잡고 집으로 안내했다.

 

회사 일로 왔다며 연락이 안 되어 직접 왔다며 내일부터라도 출근하라는 전갈이었는데

엄니는 너무 좋아하셨고 나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찾아와줬다는 거 엄니의 수다에도 나는 허벅지만 꼬집고 있었다.

엄니가 잠시 피해주고 난 뒤 그녀가 하는 말.

회사에서 보내서 온 거 아이라예.”

내일부터 나오이소,”

 

그녀의 눈에 영글어진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나는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래. 비로소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다)

그날 나는 이 사람에게 다시는 눈물 흘리게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그 맹세가 문제였다

내가 여기서 당신과 이런 생활로는 당신에게 고마움을 다 할 수가 없어.”

그 당시 섬유회사 근무조건이 열악했다.

2교대에 저임금에 요즘도 문제 삼는 40년 전의 노동자 인권이라면.

그래서 내가 노력해서 더 좋은 환경에서 우리 평생 같이 살찌며 늙자고 했다

그녀는 동의했고 나에게 감사하며 행복해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금전적으로 헌신한 심순애는 불가능했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있었기에.

하지만 재수생 애인을 둔 그녀의 자부심은 20살에 처제와 처형이 수십 명 되게 했고

그녀의 지인들에겐 이미 나는 고시 합격자였다.

그녀들의 월급날엔 마다하는 나를 끌고 친구들도 불러라 하며 거하게 한턱냈다.

당시 반 고개는 고래고기와 무침회로 성시를 이루던 곳이다.

 

너무나 행복했던 시간들 너무나 아름답고 착하던 그녀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다

감사하게만 생각하던 그녀에게 무슨 르와르도 아니고.

운동권으로 박정권의 비리에 항거하다 군사학점을 에프를 받았다.

당시 필수학점이던 군사학점 놓치면 6개월 내 입대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에 술로 세월을 보내다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나를 잊으라고.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기 싫은 것도 아니고 그녀가 싫증 난 건 더더욱 아니지만

왠지 모두 싫어졌었다.

유서를 섰다.

 

(이 더러운 세상 나 하나 죽어 고치겠냐만 더 더러워지지는 말아라.)

죽지는 못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의롭게 생각하여 외롭게 지내지 말아야 한다고

그런 생각에 이르러 절교를 선언하고 군에 잡혀갔다.

군 생활 내내 그녀와 찍은 사진을 안고 잤다.

다시 찾아갈 것이고 기다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두 번의 휴가와 제대 후 몇 년의 찾음에도

나는 그녀를 볼 수 없었고 이제 40년이 흘렀다.

 

보고 싶다.

잘못이었지만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중국 친구가 죽은 약혼자에게 면사포를 입혀 결혼식 했다면

40년이 지났지만 나로 이미 죽은 당신의 마음에 면사포를 받치고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다.

 

정말 죽기전에 꼭 한 번 보고 싶다.

아무런 의미 없더라도

미안하다 싶고

내가 진정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한 의미에게 고맙다 하고 싶다.




그때 내가 몰랐던 너의 눈물 평생동안 겪어보지 못했다.

┃꼬릿글 쓰기
⊙신인 |  2020-09-20 오후 4:31:3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늘 말하고는 합니다.
'모든 이들의 삶이 모두가 소설이라고,,,,'
선달님도 용서를 구해야 할 그리움이 하나 있군요!
제게도 그런 그리움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보지 못할듯해서 더 죄스럽습니다.
 
옥탑방별 |  2020-09-20 오후 8:27:5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그 참 첫사랑 치고는 너무 화려하구만유 ㅠ.ㅠ
난 그 첫사랑한테 처참하게 차였었는데 ㅠ.ㅠ
저는 그 이후로 김씨 집안 여자는 멀리하는 습관이 생겼을 정도입니다 ㅠ.ㅠ  
재오디 |  2020-09-21 오후 2:34:2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영화 만들어도 될만한 가슴 울리는 스토리 입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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