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스위스 사람들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시기에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머물던 궁전을 호위하는 용병을 맡기도 하는 등 용병 사업을 많이 했었다.
훈민정음은 소리글자, 표음 문자가 맞지만, 입술의 모양, 혹은 목 구멍의 모양을 본 떠서 만든 자음 등 한글 자모를 만든 원리를 살피면 상형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로마 자를 쓰는 많은 유럽 사람들이 한글을 처음 봤을 때, 자음 "ㅎ" 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었다. 여자가 모자를 쓴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이유에서 였다. 듣고 보니 이것도 그럴 듯 하다.
유럽 사람들이 한국의 한글, 중국의 한자, 일본의 가나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글자에 동그라미 "ㅇ" 이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고 한다. "ㅇ"이 있으면 한글이라는 것이다. 보니, 한자와 일본 가나에는 동그라미가 없다.
조선의 말엽 고종의 마누라 민비는 자신의 정치적 적대자들을 죽여달라고 청 (淸) 에게 군대를 보내 줄 것을 애걸복걸 간청했다. 그러자 1882년 청 (淸) 에서는 고위 관리 원세개 (袁世凱, 위안스카이, 1859년 ~ 1916년) 에게 7천 여명의 병력을 딸려 보냈다.
조선에 온 원세개는 임오군란 동조 민중을 학살하고 동학혁명군을 살륙하고 갑신정변을 파괴하는 등 온갖 패악질을 일삼다가 1894년 민비의 주요 정적 인사 몇몇을 납치하여 돌아갔다.
원세개의 군대는 서울 용산에 머물렀는데 나중에 일본군도 들어와서 원세개의 군대가 머물던 용산에 머물렀고 해방 뒤 미군도 용산에 머물렀다. 민비는 외국 군대의 용산 주둔 시대를 여는 치욕을 한민족에게 열었다.
원세개는, 그의 온갖 패악질과는 별개로, 조선에서 깨우친 것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글의 발견이었다. 원세개는 망국의 선 위에 있는 후진국이며 그들의 머슴 국가 조선에 독자적인 한글이 있다는 것에 굉장히 놀랐었다. 원세개는 바로 한글의 우수성을 알아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1894년 원세개가 청에 돌아갔을 때 청조는 혼란스러웠다. 1911년 손문이 신해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 청조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대개의 경우, 혁명의 주창자가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 새 나라를 세우면 그가 새 나라의 원수가 되는데, 중화민국의 경우는 별 노력도 안한 원세개가 중화민국의 국가 원수 대 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원세개는 거의 공짜로 신생 국가 중화민국의 대 총통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완전히 한 손에 쥐었다. 최고 권력자가 된 원세개는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평민들은 배우기 어려웠던 그들의 글자, 한국 사람들이 한자 (漢字) 라고 부르는, 정자(正字) 혹은 번자체 (繁字體, 繁字体) 를 한글로 바꾸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원세개는 한자를 한글로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다분히 무당 무속적인 반대 논리가 있었는데, 망한 나라의 글자를 사용하면 따라서 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세개는 고민을 하다가 멍청하게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번자체 (繁字體) 를 한글로 바꾸지 않고 간자체 (簡字体) 로 바꾸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 원세개가 시작했던, 번자체를 간자체로 바꾸는 작업은 모택동 시대에 완전히 마무리된다.
저런 등신, 무당 무속의 논리를 뿌리치고 한글로 바꾸었으면 지금 쯤 중국은 미국에 못지 않은 강대국이 되었을 텐데. 그리고 그 중국은 한국의 속국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이것은 아쉽다.
몇 천년 앞서만 해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그랬었지만, 무당과 무속은 당대의 최고 지식인과 문화로 평가 받고 있었다. 하여, 무당은 첨단 지식인으로 무속은 우월한 민족 문화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하 세월이 흐르면서 과학과 지식은 발전하는데 무당과 무속은 잠을 자고 있었다. 하여, 이제 무당은 낮은 부류로, 무속은 경시되는 부류로 취급 받고 있다. 하여, 지금 당장은 무당 무속을 가까이해서 좋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