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앞에는 글씨 큼직한 달력이 걸려 있다.
공간이 많은 달력에는 이런저런 간단한 메모가 적혀 있다.
내가 쓴 것도 있고 집사람이 쓴 것도 있다. 투박한 내 글씨와 여린 집사람의 글씨가 섞여 있는 달력은, 어쩌면 우리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작은 나침반이다.
추석 며칠 전이었다.
아침밥을 먹다가 문득 달력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추석’이라고 빨간 글씨로 큼지막하게 적힌 아래에 작은 검은 글씨로 음력 날짜가 적혀 있다. 15일.
“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추석이 보름이네.”
순간 얼마 전 성령강림절과 부처님 오신 날이 겹쳤던 일이 떠올랐다.
서로 다른 종교의 중요한 날이 같은 날이라는 사실이 신기했던 기억.
‘금년에는 추석도 보름과 겹치는 건가?’
나는 함께 식사하던 집사람에게 말했다.
“금년에는 추석이 보름과 겹치네.”
집사람 역시 성령강림절과 부처님 오신 날이 겹쳤던 것을 신기해 했던 터라 함께 달력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러네요. 추석날 보름달 볼 수 있겠네요.”
우리는 추석과 보름이 겹치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 한동안 달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달력을 바라보던 순간, 나는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참,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어이없어 웃자 내 표정을 살피던 집사람도 잠시 후 우리가 함께 한 착각을 알아차리고 웃었다. 둘이 한참을 마주보며 웃었다.
함께 나이 들어가며 이런 일들이 잦아진다.
가끔, 아니 자주, 어제 차를 어디에 주차했는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시간에 쫓기지 않을 때야 천천히 생각하며 찾으면 된다.
하지만 정한 시간에 목적지에 당도해야 하는, 일테면 손자의 피아노학원 라이딩을 해야 할 경우처럼 정해진 시간 안에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마음이 급해진다.
‘차를 어디에 세워 두었지?’
지상 주차장인지, 지하 주차장인지, 지하 몇 층인지 아득하게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진다.
그래서 언젠가 부터는 주차를 하고 나면 주차구역 번호가 찍힌 기둥과 차가 보이게 사진으로 찍어 둔다.
그 사진 한 장이 나에게 든든한 메모장인 셈이다.
십 년이 넘도록 내 당뇨와 고지혈증을 관리해 주고 있는 후배에게 어느 날 말했다.
“김 원장, 아무래도 나 치매 검사를 한번 받아봐야겠어.”
그러자 후배가 웃으며 물었다.
“선배님, 요즘 손주 수학 가르치신다 하셨지요?”
“그렇지.”
“요즘도 가끔 바둑 두시지요?”
“그렇지.”
후배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면 아직 치매 걱정은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웃었다.
손주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바둑판 앞에 앉아 수를 헤아릴 수 있는 머리라면 괜찮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한결 놓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이 며칠인지, 그리고 무슨 요일인지를 헤아려본다.
정신이 맑은 날은 쉽게 생각이 나지만 몸이 안 좋을 때는 멍해 있을 때가 있다.
‘오늘이 며칠이지?’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서도 오늘의 날짜와 요일이 떠오르지 않으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달래 보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까지 없앨 수는 없다.
모든, 아니 대부분의 병이 그렇지만 가장 안타깝고 그래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병이 치매이지 싶다.
몸이 아픈 것은 약을 먹고 치료를 받으며 견뎌낼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 같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이 흐려지고, 함께 웃었던 기억마저 사라진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조금씩 사라지는 일 일 것이다.
9년 째, 두 손자의 성장일기를 쓰고 있다.
말은 손자들이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 어렸던 날들을 추억하라, 쓴다 말하지만 아니다.
손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쓴다.
손주와 함께 웃었던 순간, 함께 했었던 여행, 함께 물수재비 뜨던 그 시간을 우리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게 기록한다.
집사람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시간, 둘이 함께 엉뚱한 착각을 하고 웃었던 그 시간까지 기억의 한 페이지에 보관해 두려 애쓴다. 기억이라는 것은 어쩌면 내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웃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살아낸 시간의 흐름 속에 새겨져 남는 것인지 모른다.
오늘도 식탁 앞에는 우리의 일상이 적힌 달력이 걸려 있다.
그 안에는 내가 적은 메모와 집사람이 적은 메모가 뒤섞여 있다.
나는 오늘도 식사를 하며 달력을 한번 바라본다.
그리고 날짜를 확인한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다행이다.
아직은 알고 있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웃는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시작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