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늘 우리에게 말 하셨다.
“똥 묻은 가래바지를 팔아서라도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공부를 시켜주겠다. 미국 유학이라도 너희들이 가겠다면 보내주마.”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대신 돈은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아버지 엄마가 다 쓰고 갈 거야.”
어릴 때는 그 말씀의 깊은 뜻을 알지 못했다.
우리에게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격려의 말씀으로만 들었다.
아버지는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으셨다.
할아버지는 새장가를 드셨지만 아버지가 세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새어머니 밑에서 반쯤은 고아처럼 자라셨다.
배움의 기회가 있을 리 없었다.
학교는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하셨고 육 개월 남짓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 겨우 뗀 것이 아버지가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좋아하셨다.
밥 먹을 때는 식탁이 되고 공부할 때는 책상이 되는 널찍한 두레상에 자식들이 둘러앉아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짓곤 하셨다.
그 눈길에는 당신이 갖지 못했던 배움에 대한 아쉬움과 자식들에게는 자신의 아픔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간절함이 있으셨을 것이고 그래서 널찍한 두레상에 둘러 앉아 어깨 맛 대고 공부하는 자식들 바라보며 행복하셨을 것이다.
“똥 묻은 가래바지를 팔아서라도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공부 시켜주마.”
그 말씀은 우리에게 하신 말이었지만, 어쩌면 아버지가 당신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집가면 남의 식구 될 딸들을 뭐 하러 애써 가르치느냐”는 생각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딸을 많이 가르쳐 시집보내면 남 좋은 일 하는 것이라 말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유일한 형제이셨던 큰아버지조차 딸들을 그렇게까지 가르칠 필요가 있느냐고 허리 뒷짐을 지곤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 생각은 다르셨다.
큰딸은 가까이에 두어야 한다며 시내의 사범학교에 보내시고, 둘째부터는 모두 서울로 보내 대학 공부를 시키셨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아들이든 딸이든 똑같은 자식이었다.
열이 넘는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동안 아버지와 엄마의 허리는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넉넉한 살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식들의 학비 앞에서는 이를 단단히 악무셨다.
허리 졸라매시며 자식 공부만큼은 시키셨다.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배움이 부족하여 받았던 설움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 하셨고 그것이 아버지가 우리에게 물려주신 가장 큰 유산이었다.
칠순을 넘기며 아버지는 하시던 사업을 정리하셨다.
그리고 아장아장 걷는 손자를 데리고 동네를 산책하는 재미로 사셨다.
손자의 손을 잡고 용연의 구름다리를 건너셨고 용두암의 바닷길을 산책하셨다.
평생을 바쁘게만 살아오신 아버지에게 찾아온 느린 시간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산소 이야기를 꺼내셨다.
“산소를 정리해야겠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소를 한곳으로 모으고, 먼저 세상을 떠난 엄마의 산소도 옮기고, 당신이 들어갈 자리까지 마련해 두겠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지관을 대동하고 반년이 넘도록 한라산 이곳저곳을 찾아다니셨다.
마침내 성산 일출봉이 저만치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깊은 산자락을 정하셨다.
차가 닿는 중산간 도로에서도 한참을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당시 땅값으로는 평당 백 원도 되지 않던 땅이었다.
그런데 지주는 너른 땅 한 귀퉁이를 떼어 팔 수 없다며 팔기를 꺼렸다.
아버지는 술을 사주어 가며 지주를 설득했고, 결국 평당 천 원씩 오천 평을 사셨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평당 백 원도 안 되는 땅을 평당 천 원씩 주고 오천 평이나 샀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땅값이 중요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좋은 자리에 부모님을 모시고, 먼저 간 아내를 눕히고, 마지막에는 당신도 그 곁에 눕고 싶으셨던 것이다.
길이 없었기에 땅값보다 공사비가 몇 배나 더 들었다.
석물을 옮기고 잔디를 까는 일도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해야 했다.
세 달 가까이 공사를 하며 당시 돈으로 수천만 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셨다.
모든 공사비용을 당신이 모아둔 돈으로 치르셨다.
마침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를 이장하고 당신의 가묘까지 마련했다.
비석을 세우고 상석을 놓고 석등까지 갖추었다.
모든 산 일이 끝난 날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냈다.”
그리고 당신이 들어갈 자리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엄마 옆이 내 자리, 그 아래로 너희들이 들어가고, 그 아래로 너희들 자손이 들어가면 저 아래로 오대는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때 나는 아버지가 후손들이 죽어 돌아갈 자리까지 마련해 주시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단순히 산소를 마련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살아서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으셨듯, 돌아가신 뒤에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부모와 아내를 한곳에 모시고, 마지막에는 당신도 그 곁에 눕는 것으로 삶의 마지막 책임까지 스스로 마치고 싶으셨던 것이다.
“너희들에게 물려줄 재산도 없지만, 남는 게 있어도 아버지가 다 쓰고 갈란다.”
그 말씀대로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가지셨던 돈의 대부분을 선산을 마련하는데 쓰시고 가셨다.
그래서 오천 평의 선산이 아버지에게서 장남인 나에게 물려진 두 번째 유산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집사람이 아들의 말을 전했다.
“큰아이가 지는 산소를 물려받더라도 儁이에게까지는 물려주고 싶지 않대요.”
잠시 서운함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하신 선산이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와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곳이다.
당연히 대대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들의 말을 전해듣고도 화가 나지 않았다.
아들의 마음이 이해됐다.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아버지 세대에는, 그리고 우리 세대까지도 장남이 부모를 모시고 조상의 묘를 돌보며 선산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산소는 멀리 있고, 길은 없고, 관리할 사람은 없다.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떠안아야 한다는 생각도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산소를 물려받는다는 것은 땅을 물려받는 일이 아니다.
매년 벌초를 해야 하고, 묘를 돌봐야 하며, 언젠가는 그 땅을 다시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아들이 생각하는 것은 오천평의 땅이 아니라 그 뒤에 따라오는 훨씬 더 큰 책임이고 그 책임이 지 아들에게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고 이를 저어하는 것이다.
아들의 생각을 전하자 동생들도 말했다.
“우리 살아 있을 때까지만 지금처럼 성묘하고, 우리 갈 때가 되면 의논해서 정리하도록 하십시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꾸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지금 살아 계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아버지는 평생 자식들에게 당신의 뜻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었다고 해서 자식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으셨다.
다만 자식들이 원한다면 끝까지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을 뿐이다.
선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대대손손 성묘하고 산소를 지키라 명하신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를 온전히 다하고 싶으셨을 뿐이다.
선산을 마련하신 것은 끝까지 자식들에게 짐을 남기지 않으려고 배려이신 것이다.
선산이 영원할 수는 없다.
언젠가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봉분은 스러지고 비석은 넘어갈 것이다.
일 년이면 두 번 밝히던 석등도 더 이상 불을 밝히지 않을 것이다.
명절이면 우리만을 위해서 열리던 숲길도 다시 나무와 풀숲에 묻혀갈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변한다.
사람도 변하고, 풍습도 변하고, 기억하는 방식도 변한다.
어쩌면 儁이는 증조할아버지의 산소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수 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산소를 정리하고 화장을 해서 추모 원으로 모신다고 해서 부모와 조상을 버리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디에 모셨는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아들에게 말하고 싶다.
“네가 儁이에게까지 산소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다만 한 가지는 잊지 말자. 할아버지가 왜 그 산을 마련하셨는지는 기억하자.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짐을 남기지 않으려고 이 자리를 마련하셨다. 당신의 부모와 아내를 한곳에 모시고, 마지막에는 당신도 그 곁에 눕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 물려받아야 할 것은 할아버지의 깊으신 뜻이다.”
가끔 儁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제 여덟 살, 아직 어린 손자다. 儁이를 볼 때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장거리며 걷는 손자의 손을 잡고 산책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아버지는 손자의 손을 잡고 걸으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셨을까.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평생에 걸쳐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셨다.
당신이 받지 못했던 공부를 우리는 원하는만큼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해주셨고
당신이 온 몸으로 견뎌야 했던 가난을 우리에게서 떼어내 주셨으며,
당신이 홀로 감당했던 삶의 무게를 자식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당신이 들어갈 자리까지 마련해 놓으셨다.
그것이 아버지의 삶의 방식이었다.
대를 잇는다는 것이 이어달리기의 바통을 전해주는 것이라면 그 바통은 이제 내 손에 있고 다시 아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때이다.
대를 잇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평생 지켜온 마음을 다음 세대에 건네주고 다음 사람은 그것을 또 다른 모습으로 다음 세대에 건네는 것.
계주에서 바통은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지만, 달려야 하는 길과 달리는 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아버지가 달린 길과 내가 달리는 길이 다르고, 내가 달린 길과 아들들이 걸어갈 길, 그리고 儁이가 가야 할 길은 다를 것이다.
그러니 바통을 꼭 같은 모습으로 넘겨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넘겨지는 바통에 무엇을 담느냐 일 테니까.
아버지가 내게 건넨 바통에는 오천 평의 땅도, 비석도, 석등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이런 마음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나는 못 배웠지만 너희는 원하는 만큼 배우 거라. 나는 많이 가난하고 배고프게 살았지만 너희는 배 두드려가며 떵떵거리고 살아 내거라.”
나는 이제 그 마음을 아들들에게 나의 장손 儁이에게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