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포 (1309~1345) : 고려 후기 문신. 호는 설곡.

그림 속에 선녀는 천년을 살았으나

두 볼이 발그레 아직도 예쁜데

인간들은 쳐다보다가 어느덧

귀밑머리 쑥대가 되었네

선녀와 내기 바둑을 두어서

장생술을 얻고자 하여

하염없이 그림 속을

바라보고만 있네

The fairy in the picture has lived for a thousand years ;

she looks as beautiful as ever

with two checks crimson.

People look at her and suddenly

their locks become mugwort.

Hoping to make a Baduk wager with her

on the secret of long life.

I am looking unceasingly at the picture.

그림속의 선녀는 천년을 살았건만 여전히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뽀얀 피부, 작고 가느다란 손발, 잘룩한 허리, 수줍은 미소, 홍조 띈 얼굴.

그녀를 쳐다보다 쑥대머리가 된 사람들이여 !

세월의 무상함이여 !

그러나 기필코 내기 바둑을 둬 이겨서,  천년 장생술을 얻어 그녀와 또 천년을 살겠다는 헛된 망상.

난가지몽. 

썩은 도끼자루 옆에 끼고 사호의 바둑을 구경하고 있는 왕질이나,

그림 속 선녀를 쳐다 보다 쑥대머리 된 사람들이나,

오로에 파묻혀 글재주 부리는 중생이나

부질없기는 매한가지로세.

남한산성을 오르며 (2009년 10월 10일)

산성 길은 가파르다

잘 닦인 계단 길

자연 그대로의 길

빗물이 흘러 생긴 계곡 길

맘 내키는 대로 오르면 된다

돌멩이 하나

풀포기 하나

나무와 새조차도

내게 불평은 없다

헐떡헐떡 

송골송골

온 몸의 세포가 날뛴다

적혈구는 쉼 없이 산소를 나르고

허파와 심장, 간이 춤춘다

헉헉대며 바득바득 산을 오른 이유는

세상을 내려다보기 위함 일세

하늘은 푸르나 구름은 간데없고,

산하는 그대로나 영웅은 흔적없네

돌고 도는 산성 길은

여인네 허리춤만큼 부드럽고

무심한 매바위는 옛 사람의 한을 전한다

오랫만에 막내 놈하고 남한 산성을 올랐다. 

어느때 부턴가 아빠와 어디 가기를 극구 사양만 하던 놈인데...

"오늘 같이 산에 갈까"란 말에 군말없이 선뜻 따라 나선다.

기분이 좋아져 배낭을 챙긴다.  평소엔 스틱 하나 들고 다녔는데...

시간이 어중간하여 점심을 뭘로 때울가 생각하던 중...

칼국수 2500원이란 메뉴를 보고 무조건 들어간다.

시루떡 2개가 먼저 나온다. 이게 웬 떡인가 했더니 오늘 첫 개업이란다.

나오면서 수건도 하나 선물로 받아들고 기분이 한층 업 되었다.

입구 가게에 들러 초코렛, 과자, 막걸리 한통, 숙성오리알 2개를 산다.

주인이 말한다. "그것 삭힌 오리알이에요."

뭔 말인지 몰라, "오리알 맞죠. 먹어도 돼죠."

막내놈은 오랜만에 산에오르니 숨을 할딱거리며, 머리가 아프다고 좀 쉬어가자고 한다.

산 정상엔 사람들로 붐빈다. 

빈 벤취가  있어, 자리를 만들고, 먹을 거리를 주섬주섬 꺼낸다.

아들놈 왈, "아까 산 오리알 부터 먹자."

오리알을 까니 뭔가 이상하다. 쌔까맣다. 냄새도 홍어 썩은 냄새다.

순간 역겹다 생각했지만, 설마 먹고 죽겠냐 하면서 한 입 베에문다. 맛은 뭐 그런대로다.

아들놈도 같은 생각이었겠지만 내가 먹으니 저도 먹는다. 

생전 처음 먹어 본 맛이라 호기심이 생기나보다.

막걸리와 같이 먹으니 그런대로 궁합이 맞는다. 과자와 귤도 까서 먹고, 모처럼 아들놈 하고 소풍 온 기분이다.  그리고 그간 서먹서먹하고, 서로에게 상처준 말로 생긴 앙금도 눈처럼 녹아내린다.

가을 햇살이 좋았다.  가을 바람도 좋았고,  가을 하늘도 청명하다.

더욱 좋은 것은 부자지간에 풀어진 앙금이다.

이렇게 또 가을은 간다.  세월도 또한 무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