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밑 장독대 위에 수북히 눈이 쌓였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손 안에 뭉쳐지는 눈.

햇빛드는 토담벽 양지에 기대어 졸고 있는 누렁이를 놀래켜주려

뭉친 눈을 힘껏 던져보지만 

발치에도 못미치고 괜시리 초가담장 위에 앉아 있던 참새들만 놀라서 파다닥~ 날아간다.

누렁이는 얼핏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꼬리를 한번 살랑 흔들더니,

이내 다시 앞다리 사이로 머리를 파묻는다.




농가의 겨울은 평온하다.

할머니는 아침 먹은것을 치우고 나서 베를 짜는 이웃집 귀옥이 엄마한테 놀러가셨다.

평소처럼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시는 할머니...

점심 밥때를 놓쳐서인지,

골방에서 새끼꼬시는 할아버지,

가끔씩 손에 내 뱉는 퉤퉤~하고 침 튀기는 소리가 더욱 커진다.

'할아버지 화나셨다고 가서 말해줘야지!~ 귀옥이도 보고...히!~'

4학년...

두개밖에 없는 반에서 나는 1반, 귀옥이는 2반이다.

귀옥이는 공부를 잘 하는건 아니지만 무쟈게 이쁘다.

나랑 같은 반이면 그 이쁜 얼굴을 더 자주 볼 수 있을텐데!...

숙제 안해서 선생님한테 날마다 혼난다는 코찔찔이 상태녀석이

단지 귀옥이랑 같은 반이라는 것때문에 부럽다.

귀옥이는 제 동생 어린 귀성이를 데리고

동산 언덕배기에 미끄럼을 타러 가고 없었다.

부랴부랴 돌아오신 할머니가 차려 주신 밥을 먹는둥 마는둥하고

동산을 가려고 집을 나선다.




마을을 둥그렇게 감싼 대나무 숲 뒤로 '새터'라는 얕으막한 소나무군락 동산이 있다.

그래서 20여가구 옹기종기 모여있는 우리마을은 새터마을이다.

그 꼭대기에는 평평한 구릉지가 있어서

동네 뉘집에선지 돼지를 잡는 날이면

오줌보에 바람을 잔뜩 불어 넣어서 공차기를 하기도 하는데,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오래된 묘똥이 서너개 있어

실컷 놀다 지치면 비스듬히 기대 눕곤 하는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은 꿩이 잘 나르지 못한다 하여.

세갈래의 발자국을 좆아 꿩을 뒤져 보곤 하지만,

나는 한번도 꿩을 잡아보진 못했다.

동산을 다다르기도 전에 벌써 아이들 고함과 비명소리로 시끄럽다.

한여름에도 그늘이 서늘한 구릉지 끝으로 가는 언덕 샛길위에다

쌓인 눈을 다지고 주변 눈을 더 퍼서 얹어

보리밭 밟듯 다져서 만든 빙판 길

아이들이 꽤 오래전부터 놀았는지 바닥이 거울처럼 매끈하게 빛난다.

용감한 남자애들은 혼자서도 잘 타지만,

대부분의 여자 아이들은 빠르게 내려오는 속도감에 무섬증이 있어,

코흘리개 상태의 등자락을 붙잡고 기차처럼 늘어 앉아

캬악~하고 괴성을 지르며 미끄러져 내려 온다.

뒤에서 상태를 꼬옥 끌어 안은 귀옥이,

객차를 끌듯 의기양양 아이들을 달고 내려오는 상태의 얼굴을 보며

시기와 질투.. 한편은 부러움의 눈길을 감출 수가 없다

길 옆 자그만 소나무들를 기둥 삼아

상태가 팔을 척척 감아 미끄럼을 타러 다시 동산 위로 올라갈 적에

흘리는 코를 훔쳐서 하얗게 번들거리는 상태의 옷 소매 끝자락이 더럽지도 않은지

여자아이들은 너도나도 잡아 끌며 올라가려고 한다.

동네에서 논이 제일 넓은 오대독자 수복이네 할아버지가

행여 손주가 추위에 떨을세라 화톳불을 피워 주시고

감자와 고구마를 수북히 넣어 익혀서

열심히 놀다 허기진 애들이 불을 쬐면서

맛있게 익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구은감자를 먹기도 한다.

시커멓게 검댕이칠이 된 서로의 입 주위를 가리키며

깔깔거리며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터동산에 가득하다.

천진난만했던 그 시절

아무것도 몰랐기에 세상의 모든것이 아름답게만 비쳤던 그 시절.

귀옥이, 상태, 수복이, 봉기....

그 때 그 동무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세월 지난 지금..

삶을 살아가매 덧쌓여진 오욕(五慾)을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북히 쌓인 먼지를 털듯 털어내 버리고

그 때처럼 활짝 웃었으면...

아니! 그저 가끔, 이명처럼 느껴지는 그 청량한 웃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