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

두꺼운 광목이불을 밀쳐내고 부시시 눈 부비며 일어난다.

봉창, 찢어진 창호지 틈 사이로 마당을 내다보면

할아버지는 측간 옆 외양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여물을 여물통에 털어 넣고 계시고,

소는 그 큰 눈을 꿈뻑거리며 콧김을 품어댄다.

개다리소반에 반찬과 국을 챙기고

아랫목에 묻어 둔 놋쇠그릇 밥공기를 꺼내 주시며,

내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어여 먹으라 하시는 할머니!...

환하게 웃음 지으신 그을린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 하다.

숟가락을 채 놓기도 전에

한 손엔 찌그러진 커다란 깡통, 다른 편엔 삽을 끌고

이웃집 봉기가 나를 부른다.

"승호야!~ 미꾸리 잡으러 가자!~"

나랑은 동갑이지만 어른처럼 느껴지는 봉기는

말수 적은 서울내기인 내게 날마다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준다.

내복에 쫄쫄이바지, 그위에 두툼한 솜 옷까지 껴 입고

검정고무줄이 머리를 아프게 조여 오도록,

단단히 귀마개까지 하고 봉기를 따라 나선다.

"아가!~~ 넘의 논 마구 후적거레 파헤치지 말그라 이!~

옷깃을 단단히 여며 주시면서 할머니는 잔소리를 잊지 않으신다.

겨울철 미꾸라지는 논 속에 깊히 숨어서 잠을 잔다.

읍내 중학교에 다니는 막내 삼춘의 까까머리처럼,

바리깡으로 밀어낸 듯 깍아 낸 볏뿌리 사이사이로

조금만 숨구멍이 보이면 여지없이 삽을 꼿고 흙을 떠내는 봉기!

"너두 함 해 볼래?  삽을 깊이 잘 떠야 혀~  안글먼.. 미꾸락지 머리가 짤린다."

정말 숨구멍 아래는 꼭 들어 있는 미꾸라지!

땅 속 깊히 파묻혀 있었는데 밖으로 꺼내기만 하면 살아 꿈틀거리는 미꾸라지가 신기하기만 하다.

한참을 그렇게 하다 조금 싫증이 난 듯하면

봉기는 사방을 두리번 거리다.."승호야! 우리 쩔루 가자!." 하고 나를 잡아 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동네형들이 작전까지 짜 가며 무섭게 대(竹)싸움하던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던 윗동네를 끼고

우리동네 논 사이로 양쪽에 제방이 있는 개천이 흐른다

꽤나 넓게 느껴졌던 그곳은 여름이면 동리아이들의 훌륭한 놀이터가 된다.

날이 너무 더우면 멱도 감고,

돌과 흙을 퍼다 물길을 양쪽으로 막고,

바가지나 찌그러진 냄비같은것을 가져와 열심히 물을 퍼내자면,

줄어든 물 끝자락에서 물고기들이 퍼덕거린다.

양동이로 가득 잡아 즉석에서 배를따서 매운탕을 끓여 먹기도 하고,

집으로 가져가는 그날 저녁은 할아버지께서 정종을 찾으신다.

수로에 도착하니 벌써 아이들이 꽤 있다.

물가에는 수초를 기둥삼아 얼음이 자작자작 얼어 있었으나

가운데는 종아리를  적실만큼 물이 조용히 흐른다.

저마다 뭘 찾는지, 장화를 신은 아이들은 허리를 굽혀 물바닥을 열심히 바라본다.

봉기는 익숙하게 그들을 따라 뭔가를 찾는데, 쫓아다니며 바라보니

개천 바닥 모래섞인 흙이 기다랗게 일자로 표시되어 있는 듯한 곳을 손으로 뒤지면

어김없이 갯조개가 들어있다.

추위를 쫓으려 피워 놓은 제방의 불은

누렇게 변한 풀포기를 돌돌 말듯이 꼬시르며

잉크가 종이에 번지듯 제방을 거뭇거뭇하게 물 들인다.

갯조개와 우렁등을 잡아다 그 불 위에 얹어 놓으면

이내 조개가 입을 딱 벌리고 뜨거움을 토해내고,

아이들은 열심히 먹고 깔깔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누군가 따로이 피워 놓은 화톳불에서는 고구마 익는 냄새가 고소하고,

차가운 겨울 하늘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는,

아파트 놀이터의 C.C TV처럼

초가집 토방 마루에 서있는 엄마들에게

우리 아이가 어디에서 노는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자연의 소리!..

포근한 풍경!...

훈훈한 인정!.......

정겨운 얼굴들이 가득 했던 내 고향 시골 마을!!!

그 때를 더듬어 보노라면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인생이란 이미 지어진 옷처럼 다른 모양으로 바꿀 수 없으나,

털옷의 실타래를 풀어 뜨거운 주전자 훈김을 쐬어 펴 내었다가

내가 원하는 새로운 인생으로 다시 뜨게질 하고픈 마음...

되돌릴 수 없는 어릴적 그때의 추억은,

아직은 뜨게바늘을 걸지 않은 예쁜 색실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지만

다시는 가질수 없기에.. 더욱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