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작가 코너를 보고 있자니 문득 학창시절 필화사건 하나가 떠오른다.
학교에만 가면 최류탄의 매끼한 연기를 마셔야했던 시절이었다.
친구와 나는 당시 문예지를 만든다고 용을 쓰고 있었는데, 시절이 하수상하다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시, 소설, 수필, 평론 등의 장르로 분류하여 원고를 받고 있었는데, 장르만 달랐지 글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시국상황이 그래서인지 검열에 걸릴만한 거였고, 책을 만들었다가는 누군가에 의해 금방 어디로 끌려갈 것 같은 두려움에 많은 고민을 하기도했다.
하지만 친구와 나는 받아놓은 원고를 폐기처분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했다.
인쇄를 해서 책을 내기가 쉽지 않았던 우리는 결국 필경으로 책을 내었고, 예상대로 쫒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얼마전, 함께 책을 내던 또 다른 친구가 마포 교도소에 수감된 것으로 인해 끈질긴 추적을 당하던 중이었기에 우리는 숨어지내기도 여의치가 않았다.
결국 바둑판 하나를 짊어지고 우리는 유명 사찰의 한 암자로 숨어들었다.
아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다보니 우리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바둑 맞수였던 우리는 선방에 종이 한 장을 붙혀놓고 바둑을 둘 때마다 승패를 기록했고, 그날 많이 패한 사람이 다음날 궃은 일을 하는 것을 내기로 했었다.
무어라도 표식을 해 둬야 그나마 바둑 둘 맛이라도 날 것 같고 세월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어서였다.
학교소식을 전해주던 또 다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둘 다 학교에서 1년 유기정학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예상한 일이지만 절망감과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괴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인적없는 산사에 묻혀 있기에 피끓는 젊음이 가만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대책도 없었고, 한 번씩 우리와 선문답을 하던 스님의 혀 차는 소리에 앞날에 대한 걱정이 태산 같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짬짬히 공부를 하며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감을 씻어내는 일이었다.
친구와 나의 바둑은 연전연승 아니면 연전연패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기는 쪽은 그날 계속 이겼고 지는 쪽은 계속 졌다.
불안정한 마음의 상태가 바둑에 나타나기 일수였고, 보다 불안정한 쪽은 그날 그대로 밀려 버리고 마는 그런 식이었다.
부모님들은 한마디로 난리였다.
자식들이 빨갱이라도 된 양 여기셨던 모양이다.
집에 자주 들리는 공안쪽 사람들이 겁을 얼마나 줬는지 빨리 자수를 하고 군에나 가라고 울고불고 하는 통에 좋아하는 바둑도 즐거운 마음으로 두지 못했다.
그저 시간이나 죽이고 있을 뿐 희망 하나 없는 그런 시간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스님이 바둑을 두고 있는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뜻밖에 한마디를 툭 던졌다.
마을로 내려가 곡차나 한 잔 하자는 거였다.
그러잖아도 답답한 마음에 미칠 지경인데 곡차라니 말은 안해도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입맛을 다시며 우리는 스님을 따라 마을로 내려갔다.
곡차 몇 잔에 얼굴이 달아오른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스님이 우리에게 장래 희망이 무어냐고 물었다.
친구는 언론계통이라고 말했고 나는 법계통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스님은 친구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나를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관운이 없어....."
"그럼요?..."
"그냥 바둑이나 두며 살 팔잔데,,,뭘......"
"스님, 농담이시죠...?"
"사람 사는 게 다 농담같은 게지 뭐..."
"그런데, 하필 바둑 두며 살 팔자라니요?"
"한량처럼 살 팔자니 좋지 뭘 그래..?"
이번엔 친구가 물었다.
"저는...요?"
"너는 모르겠어, 고생은 많이 하겠어..."
"무슨 고생요...?"
"그걸 내가 어캐 알아...."
그 때 술집문이 열리며 이상한 사람이 몇 들어왔다.
술집 안을 두리번거리던 그들은 우리를 보자 친구와 나의 이름을 호명했다.
스님은 눈을 감고 아무 말씀도 없이 앉아 계셨고 우리는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
결국 우리는 군 입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군생활은 어떻게 보면 행운의 연속이었다.
바둑 때문인지 그 이유는 몰랐지만 지휘관의 바둑 파트너가 되어 비교적 편한 군생활을 했으니 말이다.
물론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친구는 제대할 때까지 빡빡 기며 힘든 군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위문 공연이 왔다.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였다.
엄정행님이 부르는 가곡 비목을 들으며 눈을 감고 있는데, 비상이 걸렸다.
1979년 10월 26일의 일이었다.
잊지 못할 시간의 잊지 못할 가곡이었다.
편한 군생활과 나머지 꿈같은 학창시절을 마무리 지은 나는 스님의 말씀처럼 관운이 없었던지 보는 시험마다 낙방을 하며 결국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한량의 생활로 빠져들었다.
동아일보 정치란 기사밑에 새겨진 기자 친구의 이름을 신기하고 부럽게 쳐다보면서.....
30년의 세월이 흐르고.. 요즘도 친구와 나는 가끔 그 산사를 함께 오른다.
예전에 바둑을 두곤했던 마루턱에 앉아 옛일을 생각하노라면 오래 전 열반하신 스님의 혀 차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오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