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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령제의 삼국지 성공처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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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십상시의 난
2021-11-28 오전 11:14 조회 425추천 7   프린트스크랩


6-1. 십상시의 난


궁궐은 국가 최고 권력기구인 황제의 공식적인 집무실이자 사적 생활의 공간이기도 하다.

황제가 평생토록 그의 모든 공사 생활을 영위하는 구중궁궐에는 황제와의 사적인 관계를 이용하여 호시탐탐 대권을 노리는 세력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황후의 일족인 왕의 외척(外戚) 세력과 후궁을 돌보기 위해 설치된 환관(宦官)들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후한은 중국사에서도 외척, 환관의 전횡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시기로, 이들의 세력다툼 속에서 오랜 기간 황제는 그들의 꼭두각시 정도의 희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공교롭게도 후한의 황실에는 유전적인 요인이 있었던지, 광무제와 그 아들 명제만 각기 62, 48세까지 살았을 뿐, 나머지 황제들은 극히 단명했다.


황제가 어려서 죽으면 그 뒤를 잇는 황자는 더욱 어리게 마련이었다. 4대 황제로 직계가 단절되고, 방계에서 황위를 잇게 되니 황실의 위엄은 더욱 손상되었다.

이때부터 외척, 환관의 정쟁이 시작되었다. 화제가 열 살에 제위에 오르자, 그의 어머니 두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그녀의 오빠 두헌 등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장성한 화제는 외척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측근의 환관 정중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후한의 외척세력으로 가장 유명한 이는 양익이다.

그는 순제 황후의 오빠로 순제 때 전권을 장악한 후 충제, 질제, 환제까지 4대에 걸쳐 정치를 전횡했다.

젊은 환관들이 양익에게 4대에 걸쳐 권력을 유지한 비결을 물었다. 양익은 말하기를 폐하는 우리의 주인이다.

그를 모시려면 묘책이 있어야 한다.


그저 아첨이나 하는 짓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권력을 오랫동안 지키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무엇보다도 즐거운 놀음에 빠져서 나라의 대사를 돌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고다.

황제가 책을 읽고 학식 있는 대신을 만나게 되면 환관인 우리는 점점 미혹 할 수 없게 되므로 황제의 이성을 미혹시키는 관건은 그를 유혹하여 향락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황제의 모든 것이 우리 손아귀에 있을 터이니, 어찌 부귀영화가 오래가지 못할 까 걱정하겠느냐?”. 환제는 양익의 누이인 황후가 죽자 다시 환관의 힘을 빌어 양씨 일족을 주살했다.


이때 환제는 환관 단초 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단초의 팔을 깨물어 흘러나온 피로 선서를 하는 결의를 보이기까지 했다.

이후 후한 최대의 환관 전횡기가 도래했다. 환관은 일족이나 양자를 관리로 중용하고 관료나 호족과 결탁하여 중앙이나 지방의 관계에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정권을 독점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부정한 방법으로 관리를 등용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혹독한 가렴주구로 일관하여 호화 방탕한 생활을 일삼게 되니, 부정과 부패가 사회에 만연했다.

한편, 후한대의 지방 유력자들인 호족 중에는 시류에 편승하여 외척이나 환관과 결탁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유교적 논리로 무장하여 명예와 정절을 중시하면서 부정부패의 척결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청류(淸流)라 부르고, 환관 일파를 탁류(濁流)라고 지칭했다.

태학의 학생이거나 관리, 또는 재야 지식인이었던 이들은 세간에 광범한 여론을 조성하였다.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를 품평하여 청절한 관료를 선정한 후 이들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환관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후한에 이르면 유교가 뿌리를 내려 낙양의 태학 학생은 3만 명에 달했고, 태학의 건물도 여러번 증축되어 말기에는 24동에 1,850개의 교실을 갖게 되었다.

지방에서도 각각 사숙이 만들어져 이름 있는 학자를 스승으로 하는 동문의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유교적 의식에 고취되고 정상적인 관리 등용문이 가로 막힌 이들은 반환관 운동에 앞장섰다.

환관파와 반환관파의 대립은 '당고의 금(黨錮之禁, '당고의 옥'이라고도 불림)'으로 불리는 2차례의 대탄압으로 청류 지식인들이 관직에서 일소되었다. 이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필적되는 커다란 사상탄압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로써 표면적으로는 환관파의 완승으로 끝나는 듯이 보였으나, 지방에 세력을 갖고 있는 청류 지식인들은 재야의 잠재세력으로 광범하게 뿌리를 내려,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귀족층으로 성장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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