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황건적의 난 | 나도 작가
Home > 커뮤니티 > 금령제
금령제의 삼국지 성공처세술

작가의 말


 이 글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저작권자와 협의하지 않은 무단전재는 금합니다.
5-2. 황건적의 난
2021-11-18 오후 10:21 조회 493추천 5   프린트스크랩
5-2. 황건적의 난

노식이 잡혀가는 것을 본 장비가 격노하여 호송하던 군사를 죽이고 노식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말리고, 관우의 의견에 따라 탁군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부대를 이끌고 돌아가던 중 갑자기 산 저쪽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언덕위로 올라가 바라보니 관군이 패해 달아나고 황건적의 대부대가 산과 들을 

까맣게 뒤덮고 쫓아왔다.


관군의 대장은 노식의 후임으로 온 동탁이였다

저것이 괴수 장각이니 장각이 있는 부대를 공격해야한다.

유비의 명령아래 관우와 장비를 선두로 한 부대는 일제히 장각을 향해 돌진했다.

동탁의 군대를 깨트리고 뒤쫓아 가고 있던 장각은 뜻밖의 측면공격에 패하여 

달아났다.


위기에서 구출된 동탁은 유비와 함께 자기 진영으로 돌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말하고 그 관직을 물었다.

유비가 아직 벼슬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자, 동탁의 태도가 금세 달라졌다

잡군의 장수 따위는 상대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장비가 은혜를 모르는 놈이라며 저런 놈은 죽여야 한다고 하는 것을 유비가 말려 

그만두고 그들은 고향인 탁군으로 되돌아갔다.


황건적의 난은 실패로 끝났다

황건군은 그해 가을 주모자 장각이 죽고, 동생 장량, 장보 또한 전사하는 등 유능한

지도자를 잃고 주력군이 쇠미해졌으나, 각지에서 약 30년간 끈질긴 항쟁을 벌였다

황건적의 난 이후에 한()은 이름만 있었지 실제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황보숭을 위시한 세력가들이 공짜로 병사들을 동원하여 싸운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들은 황건군 토벌에 공을 세운 자들에게 벼슬과 상을 줄 것을 건의했다

이 전투에서 황보숭과 주준이 공을 세워 정계의 실세가 됨은 물론 기도위(騎都尉)

 벼슬에 있던 조조라는 젊은이가 전투 중 위기에 처한 토벌군을 구하는 공을 세워 

이후 중앙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황건의 난이 실패한 이유는 종교적인 운동이었던 탓도 있지만 군사적인 요인도 있다.

종교적인 운동으로 시작한 황건집단의 종교이념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는 

좋았지만 이들을 조직화된 군대로 유지하기 위한 행정이나 보급, 군사훈련의 

체계를 세우지는 못하였다.


교단이 아닌 통일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 없었기에 사실상 반독립적으로

활동한 지방의 봉기군들은 군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약탈에 의존하였고 이는 자신들의

 기반이었던 농민들을 교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황건의 난이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폭제로서의 작용도

 하였다.


태평도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중앙의 무능은 더욱 돋보였고 이미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지방세력들은 중앙정부로부터의 자치를 이루게 되었다

누런 하늘은 서지 못하였지만 이들이 촉발한 거대한 움직임으로 인하여 푸른 하늘은

 결국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난을 평정하는 기간에 이미 군사와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지방의 주군(州郡

관리들이 이 기회를 틈타 무력을 확대하였고, 각각 그 지역에서 할거하는 군벌로 

성장하여 중앙의 통제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중앙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군벌 가운데 황하 중·하류의 원소(袁紹)와 조조(曺操)의 세력이 제일 

강하였. 원소는 집안 4대 가운데 3공이 다섯 명이 나올 만큼 널리 알려진 

집안이었다

따라서, 원씨 집안은 집안과 구세력의 지지를 받아 기(((()

4주를 점거한 북방 최대의 할거 세력이었다

때문에 동탁(董卓)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 난을 진압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꼬릿글 쓰기












* 띄어쓰기 포함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000 / 400바이트)
대국실입장하기
다운로드 이용안내 고객센터
정회원가입
오로볼구매
가장 많이 본 기사
스폰서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