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 넓은 고추밭에 빠알간 고추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비료푸대를 끌며 할머니 할아버지와 고추를 따던 어린 나는

지난 늦 봄에 고추밭 맬 때

밭 고랑마다 간간히 가지를 심어 놓았던 것을 보았는데

이젠 말라비틀어져 있어 저으기 서운했다.

뙤약볕 아래서 쭈그리고 앉아 땀 흘리며 호미질 할 때

간간히 가지를 따 먹어 목을 축이면서

힘겹게 고추밭 매는 수고로움을 덜었는데...

매운 고추향이 들큰한 단내와 섞여 코 끝을 간지르고

한층 높아진 하늘로 간간히 고추잠자리가 어지럽게 날아든다.

할아버지 지게에 큰 비료푸대를 세 개나 올리고

고추가 가득 담긴 커다란 대나무 광주리를 할머니가 머리에 이고

고무신 걸음걸이 타박타박

누렁이 기다리는 초가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미 끝물이라 덩그러니 빈 수박밭 원두막 아래서

애호박만한 수박 몇 개를 뒤져서 따 왔다.

마을 입구 동네우물가에 다다르기 전

옥수수밭에서 일하시던 수복이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인사를 한다

"어르신!

금년 꼬치농새가 어찐가요?"

"아이고 못쓰겄어!

밍년에는 우리도 약을 치야 헐랑게벼!"

키 커다란 옥수수대에 묻혀 보이지않던

머리에 수건을 동여 맨 수복어머니가 옥수수 밭에서 주섬주섬 나오시더니

"아나~ 정호야.."

저녁에 할매한테 삶아돌라고 혀라"

하며 옥수수 한아름을 건네 주신다.

"하이고!~ 머덜라고 이려~~ 애써 농새진거슬..."

"아녀라~ 아짐!

어떻게 알았는지 귀옥이네 집 앞까지 달려나온 누렁이가

꼬리를 자발스럽게 흔들며

나와 할머니한테 번갈아 뛰어 올라 길을 막는데

할아버지가 지게 작대기로 후려치는 시늉을하니

쌩~하니 집으로 들어간다.

마당에서 놀던 닭들을 닭장으로 몰아서 넣고

시원한 토방마루에 배를 깔고 밀린 방학숙제를 하는데

가마솥 밥 위에 올려놓은 옥수수 냄새가 구수하다.

어느덧 황혼이 시골 마을에 가득 내려 앉고

나는 찐 옥수수 하나 귀옥이에게 건네줄 생각에

혼자 배시시 웃으며 몽땅연필에 침을 바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