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중3 시절

맨 뒤에 앉아있던 그 녀석의 괴롭힘은 집요했다.

"도로 갖다 놔!"

"니가 갖구와 새꺄!!"

분단사이의 통로를 오가며 툭하면 내 머리를 건드리던가

오늘처럼 내 신발주머니를 발로 뻥 차던가 하던 녀석의 버릇은

언제부터 휠이 나에게 꼿혔는지 모르지만 1년 내내 거의 쉬는 법이 없었다.

중학교 제복을 입고 처음 입학했던 1학년 때

우연히 눈이 마주친 어떤 녀석으로부터

그저 내가 자기를 봤다는 이유만으로 무방비 상태에서 선방을 얻어 맞을 때에

나는 아무런 이유없이도 물리적인 폭력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할아버지로부터 누누히 가르침을 받아 왔던

반가의 자손으로서 예의와 범절, 도덕과 사람의 도리라는 교육에 순화되었던

지극히 소심하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던 나는

그 날 이후 약육강식은 동물의 세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닫고

약하고 여리기만한 스스로에 좌절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와 무관하다면 어떠한 종류이던 폭력의 현장에 호기심이 많았다.

장터에서 우연히 목격한 싸움의 구경이나

당시 꽤나 인기있었던 세기의 매치 조지포먼,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져 등의 복싱경기,

또 유제두와 와지마 고이찌의 미들급 타이틀전등에 꽤 열광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가 하시던 조그만 공장에서 일하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일이 끝나면 체육관에 나가 복싱을 배웠는데

가끔 밤에 혼자 쉐도우복싱을 할 때

주먹을 뻗을 때마다 쉿 쉿!~하면서 콧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신기하며

고사리 손으로 주먹을 쥐고 옆에서 따라하던 나에게

꽤 오랜동안 체육관에서 배웠던 요령을 가르쳐주던 그는 나의 사부인 셈이다.

사진: 홍수환 카라스키야 4전5기의 신화

중3학년 내내 나를 이지매했던 녀석과의 사건은

전 날 염동균의 로열 고바야시와의 타이틀 매치에서

통쾌하게 KO승을 거두는 장면을 사부와 함께 목격하고

쌀쌀해진 날씨 탓에 어머니가 사주신

검정 가죽장갑을 끼고 등교한 다음날의 일이였다.

"내 신발주머니 갖다 놔!"

대꾸도 못하던 평소와는 다른 제법 비장한 내 목소리가 이상했는지

녀석은 내게 서서히 다가서면서 말한다.

"못 갖다논다 어쩔래 이새꺄!"

뻥 차여진 신발주머니에서 삐죽 삐져나온 실내화 한 짝의 처량한 모습!

건너편에서 나를 향해 피식~ 하고 비웃는 또 다른 반친구의 조소가 없었더라면..

주먹을 쥐면 꽉 조여지는 느낌을 주는 가죽장갑이 없었더라면..

어제의 염동균 타이틀전이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그리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리를 솟구쳐 일어나 주먹을 뻗어 정확히 녀석의 면상에 내질렀다.

묵직하게 주먹에 전달되는 생소한 느낌에 쾌감을 느낀다.

뒤로 밀리는 녀석에게 스트레이트, 훅, 보디,를 섞어

일곱번인가 뻗은 주먹에 단 한번도 미스 샷이 없었다.

교탁앞까지 밀려 쓰러진 녀석을 뒤로 하고

나는 천천이 내 신발주머니를 주워서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반친구들의 휘둥그레진 눈,

순식간 모두들 경악으로 입이 딱 벌어진다.

1년 내내 새색씨처럼 말없이 얌전하기만한 내가

덩치 큰 녀석과 싸움을 했다는 것에 대한 놀람이 아니라

대개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는 아이들 싸움에서

가드를 올리고 정확히 복싱기교를 써서 녀석을 몰아부친 것이 신기했으리라.

정신을 수습하고 분노에 찬 얼굴로 내게 달려오는 녀석과 동시에

종례를 하러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신다.

흘깃 선생님의 눈치를 보더니 녀석이 나즈막히 말한다.

"너 이새끼!.. 끝나고 교문앞으로 나와!!"

나중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