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까치 설날,
팥죽색 프라스틱 함지에다 불려놓았던 쌀을 가득 담아 이고
방앗간에 가시는 할머니를 따라 나섰다.
방앗간은 중산리 큰길가에 있다.
쌓였던 눈이 따스한 겨울 햇살에 녹아 길은 질척거린다.
따라오는 누렁이를 돌을 던져 쫓아 버리고
나는 할머니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촐랑거리며 신이 났다.

동네 어귀에서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아 박달나무 팽이를 깍고있던 상태가
나를 보더니 묻는다.

"워디 가냐?"
"방아갓에 떡빼러 간다.~
"히이!~ 좋긋다!
"너도 갈래?

상태와 나는 동시에 할머니를 올려다 본다.
머리에 인 함지때문인지 고개를 제대로 못 돌리고 눈만 돌려 내려보시면서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그려~ 상태 너도 가자!~ 떡 묵고 잡재? 그대신 너 우리 승호랑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놀아야 혀!~
환해지는 상태의 얼굴,
팽이와 부엌칼을 팽개치듯 내려놓더니
손을 때꾹쩔은 바지가랑이에다 쓰윽싹~ 문지르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한다.
"아 글먼요 할매!! 지는 승호랑 절대 안싸워라우!!~
접때도 승호가 진기랑 싸울라는거 지가 말렸는디요??
"암먼 그리야지!...
덩달아 신이 나 궂이 하지않아도 될 말을 하는 상태의 말에 움찔해진 나를
할머니는 슬며시 흘겨보신다.
사돈의 팔촌...촌수를 헤아리기도 어렵지만 동리사람들은 대부분은 친척이 된다.
우리 할머니한테도 할매라 부르는 상태는
제 할아버지랑 단 둘이만 살고 있어선지 동네사람들이 항상 뭔가를 준다.
'울옴마 울아부지는 서울로 돈 벌러 갔어!'
상태가 늘상 하는말과는 달리
어느날 무슨 이유에서인가 모르게 사라진 상태엄마를 찾으러

기침 잦은 노인네와 새끼하나 달랑 놔두고 떠났다가 종무소식인 상태아버지를

상태를 볼때마다 할머니는 혼잣말로 탄식하듯 나무라신다.
'으이그! 너갱이 빠진 인사같으니!~ 오늘낼 허는 늙은이랑 불쌍헌 새끼는 어찌라고!...'

신작로를 따라 한참을 걷고 햇빛에 얼음이 살살 풀리는 방죽을 끼고 돌아
봄철 모를 낼 때면 개구리가 득시글한 수복이네 넓직한 논을 지나면 바로 중산리 마을이다.
중산리에는 1.2.3.4.가 각각 큼지막히 씌여진 양철로 씌운 문짝이 있는 구멍가게가 있으며 
그 안은 마치 동화속 보물창고처럼 느껴졌었다.

나는 특히 하얗고 매끄럼한 구슬같은 독사탕을 좋아했지만,
큼지막한 설탕덩어리가 우둘투둘 붙어 자그만 철퇴처럼 보이는 색색깔의 왕사탕도 맛있었다.
"할머니!~ 나 아탕!"
구멍가게를 가르키며 나는 하나밖에 없는 버릇없는 손주답게 유난히 어린양을 해보지만,
"안뒤야 아가! 명절에 머 사묵는거 아녀!~ 이따 가래떡 묵자 이?~~"
평소와는 달리 냉정히 거절하신다.



방아간에는 벌써 꽤 많은 마을사람이 모여있었다.
피댓줄 감기는소리,
쇠톱니바퀴 맞물려 스르륵~ 돌아가는소리,
꿍-꿍 뭔가를 찧는소리...
마치 작은 시계부속안을 크게 뻥튀겨 놓은듯 방앗간 안의 움직이는 것들은 언제보아도 신기하다.
떡을 찌는 김이 천장을 구름처럼 덮었고,
좁은 틈바구니를 뛰댕기는 아이들,
기계 만지지 말라고 손사래질 하시는 방앗간 아저씨는
지난명절에 보았을 때보다 훨 늙어보인다.
미리 불려놓은 쌀을 곱게 빻아서 불을 때 찌고
잘 삶아진 쌀을 네모난 기계통에다 털어서 꾹꾹 눌러 넣으면
하얗고 기다란 가래떡이 둥굴고 통통하게 예쁜모습으로 물 담아 놓은 스뎅다라이(스텐인레스함지)로 쭉쭉 빠져나온다.
"할무니~ 나두 떡!!!
처음 나온 가래떡 끝을 맛 보고 계신 할머니를 졸라
나랑 상태는 한발씩이나 되는 떡을 양손에 나누어쥐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좋아라 웃는다.
아저씨가 떡 나오는 주둥이 끝을 뭔가 다른걸로 갈아 끼우면
가래떡은 넓적하고 평평하게 나오는데
문지방모양이나 꽃모양이 새겨진 넓적한 방망이같은 떡살로 꾸욱 누르면
그 예쁜 문양이 도장처럼 떡에 찍히고 기름을 발라 칼로 뚝뚝 썰어내는데
마름모 꼴의 네모진 떡이 먹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뻐진다.
방앗간을 나서면서 할머니는 바가지에다 가래떡을 채곡히 가득 쌓아 상태에게 주신다
금방까지 함께 히히덕거리며 친하게 놀았지만
할머니가 웬지 떡을 너무 많이 덜어낸 것같아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잊어버릴 정도로 철모르던 그시절....
해마다 이맘때면 그때가 더욱 사무치게 그립다.

오늘의 명절,
백화점에 들려 주류나 한과세트같은 선물용품을 고르면서
누구는 무엇을 드리고, 또 지난번에 드린 선물과 겹쳐지는것이 없나를 고민하는 정도가
겨우 명절임을 알게되는 척도로 변해버렸다.
떡국 한그릇의 의미를 한 살 더 먹는것으로 알 정도로 무엇이든 귀했던 그때와는 달리,
아무 분식점이나 가서 시키면 곧바로 먹을수 있는 떡국처럼
지금은 무엇이든 누구나 흔하게 가질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옛날 그 때의 질그릇처럼 투박하면서도 따스했던 고유한 서정만큼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