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수요일.

회원님들 안녕하세요? 오늘은 회원님들께 편지를 써봅니다. 맨날 혼자 얘기하다가.. 회원님들께 수다를 떤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새롭네요.

은하는 오늘 계시를 하러 한국기원에 갑니다.

원래는 금요일과 일요일에만 하는데, 오늘은 이른바‘땜빵’ 입니다. (집이 기원과 가까워서 종종 땜빵을 하러 가지요^^)

미리미리 스케줄을 짜 놓는 조연출님 덕분에.. 이미 예고된 땜빵인지라.. 퇴근을 하고는 여유있게 저녁을 먹으러 나섰습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떡볶이. 은하의 단골집에서 삶은계란 한 개에 어묵꼬치까지 추가해서 맛나게 먹고는 기원으로 출발~!

밀가루 음식이 안 좋다는데.. 왜 은하는 네모철판 위에서 자글자글~ 끓는 빨간색만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는지..

제대로 된 식사 안하고 맨날 군것질로 때운다고 엄마한테 혼이 나면서도 떡볶이를 못 끊겠네요... 담배 못끊으시는 애연가분들.. 떡볶이 못 끊는 애(愛)떡볶이가(?)로서.. 그 심정 십분 이해합니다. ^^

기원 가는 길..

기원에 조금 못 미쳐 택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걸었습니다. 이렇게 여유있다니~ 아.. 이 여유가 너무 좋습니다. 걷다가 길가 옷가게 쇼윈도에 걸려있는 이쁜 치마를 하나 발견! “이거 얼마에요?” 했더니.. “아가씨 싸이즈는 없어~” 합니다.

그러고보니 부인복 가게네요.. 그래도 욕심이 나서.. “줄이는 비용 5천원 빼주세요~” 했습니다.

“아가씨 장사해도 되겠다~” 주인아주머니가 밉지 않게 눈 한 번 흘기고선 마네킨에서 치마를 벗겨서 싸주십니다. 은하 한테 치마를 뺏긴 마네킨.. 밤바람이 찬데.. 살짝 미안하네요^^

백화점에서 ‘손님~’소리 들으면서 하는 쇼핑도 좋지만.. 언니.. 아가씨.. 해가며 반말을 건네는 동네쇼핑을 은근히 좋아하는 은하.

충동구매이긴 했지만.. 나중에 계시를 끝내고 집에 와서 입어보니.. 바람직한 충동질(!)이었던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늘은 대구 영남일보와 경기 한게임 간의 바둑리그 12라운드 1경기 1,2국이 열리는 날입니다. 1국에서는 영남일보의 이영구 사범님과 한게임 원성진 사범님의 대결. 양팀 모두 주장이 출전해서인지 대국 전부터 살짝 긴장감이 돌더군요.

계시기와 숫자판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았습니다. 은하는 귀문이 정말 작습니다. 어른들은 돈벌면 정말 안쓰겠다고 타고난 복이라고 하시길래 그저 좋은 줄만 알았는데.. 계시원 하기엔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이어폰이 귀문에 밀려 자꾸만 빠지거든요.. 최대한 꾸욱 눌러 끼고는 다시한번 자세를 바로 해 봅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스튜디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범님의 입장. 조명이 밝아지며 해설자의 멘트가 시작되고.. 이내 계시원의 멘트.. ‘대국을 시작하겠습니다.’ .. 대국의 시작을 알리는.. 이상하게도 저는 아직도 이 멘트를 할 때면 항상 설레고 심장이 빨리 뜁니다.

1국은 이영구 사범님의 승. 대국장 밖에서도 꾸벅 인사하더니 대국장에 입장하면서도 눈이 마주치자 꾸벅 인사하던 이영구 사범님. 예의바름이 몸에 밴 건지.. 하루에 세 번 만나면 세 번 다 꾸벅~ 인사하는 꾸벅맨입니다. ^^

이영구 사범님의 특이한 버릇을 하나 발견했는데요.. 바둑을 두면서 계속 돌들의 위치를 바로잡더라구요.. 아침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의 긴긴 '훈화말씀'시간동안.. 반별로 선 줄 사이를 돌아다니며 줄을 바로세우던 체육선생님이 생각나.. 슬며시 웃었습니다^^  

은하 스스로 평가하기에.. 1국 계시는 평이하게 한 것 같았는데.. 나중에 전해들으니 원성진 사범님이 검토장에 돌아가.. 계시가 조금 빨랐다고 했다네요.. 빨랐나? 1초에 하나씩 정확히 세면.. 확실히 듣기에 좀 빠른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어요~ 1초에 하나씩 세라는데.. ㅜㅜ)

2국은 김지석 사범님과 온소진 사범님. 초반부터 백을 잡은 온소진 사범님이 좋아보입니다. 저 순하고 차분한 아이(?)가 왜 별명이 ‘온포’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 별명이 온포냐는 질문에.. 바둑이 깡패야.. 라고 대답하며 웃던 온사범님.. 그런데 오늘 바둑은 어째 깡패는 아닌 것 같습니다.

꽃미남의 계보를 잇는 김지석 사범님. 조명을 받으니 하얀 피부가 더 하얗게 보입니다. 예전에 속기바둑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이시대 최강의 속기 기사는 누구냐! 라는 주제로 몰아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들은 이야기인데.. 특히 초속기인 인터넷바둑에서.. 빠른 수읽기와 그보다 더 빠른 감각을 지닌 기사는.. 단연 이세돌. 그리고 그 만큼의 감각을 지닌 기사는 김지석이다.. 라고..

바둑은 어느덧 형세가 바뀌었습니다. ‘치열하다.’라는 단어가 필요한 형국. 그리고 해설자의 멘트에 귀를 기울이니.. 김지석 사범님 쪽으로 기울어가는 분위기인 듯 합니다.(미세한 상황의 형세판단을 할 실력이 못되어서^^ 물론 집을 세고 있을 상황도 아니긴 하지만..)

아.. 김지석 사범님의 승인가..? 그런데.. 어? 끝내기 단계인 줄 알았는데.. 김지석사범님의 실수가 터지고... 대마가 잡혔습니다. 화들짝 놀라고 이내 굳어진 얼굴.. 두어수를 더 두더니 돌을 거둡니다. 복기를 할 틈도 없이.. 인사를 하고 일어서는 김지석 사범님. 열이 났는지 자켓을 벗어들고 황급히 대국장을 벗어납니다.

갑작스런 승리에 더 당황한 온소진 사범님. 승자인터뷰를 해야하는 상황인데.. 스튜디오는 지금 정신이 없습니다. 김지석 사범님의 승자인터뷰를 준비했던 리포터도 멘트를 고치느라 바쁘고.. 갑자기 들어와 급히 옷을 갈아입고 나간 김지석 사범님의 모습에 코디님도 놀란 모습입니다.

온소진 매직(magic)..인가? 작년 이맘때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공배를 메우다가.. 단수를 못 본 상대로 인해 승리를 했었던 온사범님. 온소진magic 이 정말 있는 모양입니다. ^^

그나저나.. 김지석 사범님.. 정말 속상하겠네요. 다 이긴 바둑. 끝내기에서.. 한수로 뒤집혔으니.. 표정도 많이 안좋던데.. 얼른 털고 다음 승부에 매진하시길.. 파이팅!! 한번 외쳐봅니다.

승자인터뷰 내내 겸연쩍어하는 온사범님을 뒤로하고, 옷을 갈아입고 기원을 나와 택시를 잡았습니다. 오늘따라 날씨도 추운데 왜이리 안잡히는거야.. 한참을 걸어내려가서야 은하 앞에 선 택시.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부끄럽네..’ 하는 온사범님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마음이 안편한가봅니다.

이긴사람도.. 진사람도.. 아파하는 승부.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아픕니다.

역시 바둑계는 은하에겐 무서운 동네.. 라는게 오늘의 교훈인가요?

사진 : 최진용기자님

바람이 많이 찹니다. 편지를 쓴게 10월 10일인데.. 벌써 11월이 코앞이네요. 올해는 이상하게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은하가 좋아하는 가을이 너무 짧아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아직 못 건드려본 계획이 있다면.. 올해가 가기전에 저질러(?) 보는건 어떨까요?

그러고보니.. 은하도 하나 저질렀(!)습니다.

지난 20 여년간 은하를 괴롭혔던 편도선님을 보내드리기로 했지요.. 편도선을 오래 앓다보면.. 코도 나빠지고 귀도 나빠지고.. 진작 보내드렸어야했는데.. 전신마취라는 말에 겁을 집어먹고는 이제껏 끙끙거리며 버텼거든요.. 일년에 7번 이상 편도선을 앓으면 수술을 하래던데.. 은하는 일주일에 두번 이상 편도가 부어 끙끙대면서도 이제껏 안했으니.. 참 미련곰탱이지요? ^^ 

그래서 올해 계시는 지난 서울투어가 마지막이었답니다. 11월 초에 수술날짜를 잡았거든요.. 마지막인걸 어떻게 알고.. 1국, 4국, 5국까지.. 세판 연속 계시라는 시련(?)을 내려주신 양 팀 사범님들.. 감사합니다..ㅋ
아무튼 마지막으로 실컷(!) 계시했네요.. 헤헤^^

이제 연말엔.. 밀린 계시원일기도 쉬엄쉬엄 쓰면서.. 내년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모두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그럼 이만 총총..

답장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