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학번 졸업증명서 | 나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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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학번 졸업증명서
2026-05-07 오전 7:24 조회 659추천 6   프린트|스크랩

집사람은 결혼 후 줄곧 부모님을 모시고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왔다.

늘 가족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자기 이름으로 불린 적은 없었다.

“아무개 씨의 큰 며느리” 그리고 “아무개의 부인” “누구 엄마” “누구 할머니”로만 불리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비록 손자를 위한 작은 어린이집이지만 ‘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는 그저 즐거워 보였다.

처음 어린이집에 다니게 된 손자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각각 원장선생님과 수학선생님으로 불러야 한다는 사실조차 신기해하며 좋아하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아들, 며느리 또래의 학부모들과 상담을 하고 그보다 훨씬 어린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대여섯 살 아이들이 뒤뚱거리며 달려와 “원장선생님!” 하고 매달릴 때면 집사람의 얼굴은 늘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던 집사람이 손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조금 덜 즐거워 보였다.

늘 곁을 맴돌던 손자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며 할머니의 손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은근한 서운함이 생긴 듯했다.

며칠 전, 집사람이 슬며시 말을 꺼냈다.

“나도 당신처럼 수학선생님 해보고 싶어.”

내 의견을 묻는 말투가 아니었다.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가르치는 일이라도 교육청에 강사 등록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졸업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증명서를 인터넷으로 발급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77학번인 집사람은 직접 졸업한 학교의 교무처까지 찾아가야 했다.

“요즘 애들은 인터넷 발급이 되는데, 우린 옛날 사람이라 학교까지 가야 한대.”

투덜거리는 말이었지만 표정은 들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일 년 만에 장거리 드라이브에 나섰다.

봄 볕이 따뜻한 사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우리는 오래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처음 편지를 주고받던 일, 처음 만나러 가던 날 타고 가던 버스가 빗길 웅덩이에 빠져 세 시간 넘게 다방에서 집사람을 기다리게 했던 일,

설악산 내려오던 버스에서 자리가 없어 내 무릎에 앉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던 일,

기억은 정확하지 않아도, 감정의 선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저기쯤 친구들과 소풍 갔던 것 같은데…”

“도시락 싸가지고 가서 김밥 다 뺏어 먹히고…”

학교 근처에 다다르자 집사람은 점점 말이 많아졌다.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저기! 친구들이랑 맨날 가던 빵집!”

“여기 개천… 저 징검다리 건너다가 한 번 빠질 뻔했는데 기억나?”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절의 나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집사람의 기억 속에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학교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집사람의 걸음이 느려졌다.

말을 멈추고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은 새로 지어졌고, 운동장은 예전보다 좁아졌다고 했다.

“이상하다… 낯선 데 익숙해.”

교무처에서 졸업증명서를 신청하는 동안, 집사람은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치 교수님 앞에 선 신입생의 학생처럼.

담당 직원이 “77학번이세요?” 하고 묻자, 조금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종이 한 장이 건네졌다.

“오백 원입니다.”

오십 년 가까운 시간이 담긴 종이였다.

집사람은 졸업증명서를 한참 바라보았다.

별것 아닌 종이 한 장인데, 그 눈빛은 달랐다.

지나온 시간과, 이제 막 시작하려는 시간이 그 안에 함께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돌아오는 길, 집사람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야.”

오십 년 만에 다시 찾은 학교에서 집사람은 졸업증명서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젊음도 함께 꺼내 온 듯했다.

“그래, 나도 우리 儁이에게 내가 아는 수학 다 가르쳐 줄 거야. 대수학도, 기하학도, 해석학도, 위상수학, 이산수학, 통계학… 모두 다 가르쳐 줄 거야.”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아직도 살아가야 할 날이 아득한 젊은 사람들처럼.

그날 고속도로는 평일이라 그런지 막힘없이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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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부 |  2026-05-07 오후 7:16:14  [동감1]  이 의견에 한마디
영포님.
기억이 나실런지는 모르겠으나, 자유게시판 시절에 가짜 구슬찾기 문제에서 몇 개까지 몇
번을 거쳐야 가짜구슬을 고를 수 있느냐의 문제를 영포님께서 행렬을 이용하여 푸는 것을
보고서 내심 놀랐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을 중퇴했어도, 내 나름 독학과 학원을 오가며 상위1% 수준
의 고등학교 수학을 마스터 했으나 그 당시 고교과정에서는 행렬이 없었습니다.  
엽부 그런데 영포님이 행렬로 그런 것을 푸시는 것을 보고 대학 졸업자들이 내심 부러
웠습니다.
외람 되지만, 집에 내자 되시는 분과 함께 의논해서 아이들 교육에도 써 먹을 겸
해서, 그런 소재들을 찾아서 나작에 중간 중간에 한번 올려 보심이 어떨런지요?
그리고 그런 소재를 찾아서 일반이들이 이해하도록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
운지 영포님께서도 한 번 당해보시라는 겁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가족 모두 평안하고 건강하시길…
영포인트 전 이제껏 수학이 메인이라 생각해 왔습니다.
학문에서도 삶에서도 수학은 모든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대단히
유익한 도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엽부님이 연재중이신 천체물리학을 읽으며 수학은 메인이 아니라 유능한 서브의
자리에 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영포인트 행렬(matrix)이라는 놈은 참 재미있는 놈입니다.
아주 간단한 2*2matrix만으로도 4차원의 공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3*3matrix면 9차원의 공간도 쉽게 만들어지고 matrix로 차원의 이동이 가능합니다.
물론 엽부님처럼 모델을 만들 수도, 설명해 낼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쉽게,
정말 우리 꼬맹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려 애는 쓰고 있습니다.
금령제 |  2026-05-10 오전 1:03:0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아기자기한 정감 넘치는 글 잘 보았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살아가야 할 날이 아득한 젊은 사람들이기에.....
감사합니다  
영포인트 네... 마치 백 년이라도 더 살 것처럼 오늘 하루를 살아내십시다.
말없이 |  2026-05-11 오후 5:17:4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엽부.영포인트! 요즘 두사람의글은 우매한 나로서는 전혀 이해불가지만 분명한것은 두사
람모두 두뇌가 엄청 명석한것은 틀림 없을것같음.
그리고 이념적 성향이 극과극인 두사람이 공통의 관심사에는 상호 공감하고 소통하는것을
보고 놀랍고도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함. 어찌되었건 무식하여 대화에는 끼지 못하지만
두사람의 커뮤니케이션 긍정적이고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음.엽부님과는 언젠가 볼날이 있
을것임. 건강을 빔  
엽부 반갑습니다. 건강하시죠?
대구 오시면 꼭 전화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건강하신것 같아서 반갑고 보기 좋네요.^^.
영포인트 애들이 그렇습니다.
어느 날은 욕짓거리 섞어가며 말을 다투다가도
다음 날 맛있는 거 있으며 깔깔거리며 나누어 먹는... 그런 아이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늙은 애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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