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은 결혼 후 줄곧 부모님을 모시고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왔다.
늘 가족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자기 이름으로 불린 적은 없었다.
“아무개 씨의 큰 며느리” 그리고 “아무개의 부인” “누구 엄마” “누구 할머니”로만 불리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비록 손자를 위한 작은 어린이집이지만 ‘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는 그저 즐거워 보였다.
처음 어린이집에 다니게 된 손자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각각 원장선생님과 수학선생님으로 불러야 한다는 사실조차 신기해하며 좋아하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아들, 며느리 또래의 학부모들과 상담을 하고 그보다 훨씬 어린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대여섯 살 아이들이 뒤뚱거리며 달려와 “원장선생님!” 하고 매달릴 때면 집사람의 얼굴은 늘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던 집사람이 손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조금 덜 즐거워 보였다.
늘 곁을 맴돌던 손자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며 할머니의 손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은근한 서운함이 생긴 듯했다.
며칠 전, 집사람이 슬며시 말을 꺼냈다.
“나도 당신처럼 수학선생님 해보고 싶어.”
내 의견을 묻는 말투가 아니었다.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가르치는 일이라도 교육청에 강사 등록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졸업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증명서를 인터넷으로 발급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77학번인 집사람은 직접 졸업한 학교의 교무처까지 찾아가야 했다.
“요즘 애들은 인터넷 발급이 되는데, 우린 옛날 사람이라 학교까지 가야 한대.”
투덜거리는 말이었지만 표정은 들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일 년 만에 장거리 드라이브에 나섰다.
봄 볕이 따뜻한 사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우리는 오래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처음 편지를 주고받던 일, 처음 만나러 가던 날 타고 가던 버스가 빗길 웅덩이에 빠져 세 시간 넘게 다방에서 집사람을 기다리게 했던 일,
설악산 내려오던 버스에서 자리가 없어 내 무릎에 앉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던 일,
기억은 정확하지 않아도, 감정의 선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저기쯤 친구들과 소풍 갔던 것 같은데…”
“도시락 싸가지고 가서 김밥 다 뺏어 먹히고…”
학교 근처에 다다르자 집사람은 점점 말이 많아졌다.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저기! 친구들이랑 맨날 가던 빵집!”
“여기 개천… 저 징검다리 건너다가 한 번 빠질 뻔했는데 기억나?”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절의 나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집사람의 기억 속에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학교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집사람의 걸음이 느려졌다.
말을 멈추고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은 새로 지어졌고, 운동장은 예전보다 좁아졌다고 했다.
“이상하다… 낯선 데 익숙해.”
교무처에서 졸업증명서를 신청하는 동안, 집사람은 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치 교수님 앞에 선 신입생의 학생처럼.
담당 직원이 “77학번이세요?” 하고 묻자, 조금 쑥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종이 한 장이 건네졌다.
“오백 원입니다.”
오십 년 가까운 시간이 담긴 종이였다.
집사람은 졸업증명서를 한참 바라보았다.
별것 아닌 종이 한 장인데, 그 눈빛은 달랐다.
지나온 시간과, 이제 막 시작하려는 시간이 그 안에 함께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돌아오는 길, 집사람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야.”
오십 년 만에 다시 찾은 학교에서 집사람은 졸업증명서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젊음도 함께 꺼내 온 듯했다.
“그래, 나도 우리 儁이에게 내가 아는 수학 다 가르쳐 줄 거야. 대수학도, 기하학도, 해석학도, 위상수학, 이산수학, 통계학… 모두 다 가르쳐 줄 거야.”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아직도 살아가야 할 날이 아득한 젊은 사람들처럼.
그날 고속도로는 평일이라 그런지 막힘없이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