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야...

시골가서  할아버지 할머니랑 쪼까 있어

고모가 후딱 데리러 갈랑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나는 돌 볼 사람이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촌에 가서 살기 싫다는 나를 억지로 달래느라

독사탕 한 봉지와 100원짜리 지전을 손에 꼭 쥐어주며

낯선 친척 아저씨께 신신당부를 하시는 고모 눈에 눈물이 굅니다.

하루 종일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또 버스를 탔습니다.

아주 가끔 마주오는 차가 지날 때마다 먼지가 풀풀나는 비포장 신작로,

듬성듬성 하늘을 찌를듯이 서 있는 미류나무 가로수 

비루해 보이는 몇 안되는 시골사람들을 태우고

그 길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인생이

내가 가는 이 길처럼 순탄치만은 않으리라 느낀 듯 합니다.

드디어 도착한 면 소재지 앞에는

남루한 옷차림의 할머니가 마중나와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릴 때

후욱~  풍기는 거름 냄새 실은 시골 공기...

읍내 조그만 구멍가게 앞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바라보던 꼬질꼬질한 촌 아이들...

땜통있는 까까머리에  햇빛에 그슬린 얼굴들을 보면서

내가 여기서 저 애들처럼 학교를 다니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나지않습니다.

"아이고 내새끼야~"

반색을 하며 다가와 나를 감싸 안으시는 할머니 품이 낯설었습니다.

"그 먼디서 아그 데꼬오니라 욕 봤소!"

서울서 함께 온 아저씨가 나를 할머니께 인계하고 돌아설 때

나는 내가 떠나왔던 곳과의 마지막 끈이 단절됨을 느낍니다.

태동을 지나 우리 마을 새터로 걸어가는 길은

어린 나에게는 너무 멀게 느껴졌습니다.

콩 밭, 고구마 밭

비가 온 뒤면 싸리버섯이 널렸던 소나무 언덕

다시 대나무 숲 길을 지나고

쓰러질 듯한 초가집들의 낮은 토담들을 거쳐서

외따로 떨어진 탱자나무 울타리집 안 쪽으로

무섭게 개 짖는 소리를 들을며

정자가 있는 높다란 언덕을 하나 더 넘어 올라서니

20여가구 옹기종기 모여있는

해질녁 황혼빛에 감싸인 새터의 초가 마을이 눈 아래 고즈넉히 자리합니다.

집에 와 무뚝뚝한 할아버지에게 고모에게 배운대로 큰 절을 올리고

어두침침한 호롱불 앞에서

보리밥 담긴 놋쇠그릇에

외간장에 참기름을 넣어 비벼서 저녁밥을 먹는데

마당에서 누가 할머니를 부릅니다.

"아짐! 지여라우~

아 정호가 왔다고 히서 부꾸미 좀 부쳤고마이라우~

대나무 채반을 받쳐든 옆집 아주머니 등 뒤에는 아이가 업혀있고

제 엄마 치맛자락을 당겨 얼굴을 반 쯤 가린채

수줍은 듯 나를 보는 여자아이가 하나 서 있습니다

"애고야~  니가 정호냐?.. 고 놈 참 똘방지게 생깄네!

아짐! 쟈가 우리 귀옥이랑 동갑이쟈뇨? 

호호!~ 야야 귀옥아 머허냐!~ 쟈가 정호여!~ 니가 보고잡다고 혔자녀  어여 인사히봐.."

(귀옥이!.....)

배시시 웃으며 뒤로 물러서는 여자애의 눈이

어스름한 어둠속에서 보석처럼 빛납니다.

어쩐지 시골 생활이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은 예감.

시골의 어둠은 점점 짙게 내리고

마당 한 쪽에 모기를 쫓느라 

들쑥풀에 생솔가지를 얹어 태우는 냄새가 구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