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짧은 유년시절...
논과 밭..적당히 물이 흘러 놀기 좋았던 냇가,
구부정한 소나무들이 어우러지고
싸리버섯과 고사리를 뒤지던 자그마한 언덕들이 물결치던 농촌에서
부모님과 따로 떨어져 보내야 했습니다.

그 때는 항상 혼자이고 외롭다고 느꼈었지만
환하게 웃어주시던 할머니와 무뚝뚝하셨던 할아버지,
담장 초가지붕 이엉에 뿌리를 내리고 슬며시 삐져나온 나리꽃에서부터
지나칠 때마다 무섭게 개가 짖던

마을 어귀 부안댁네 탱자나무 울타리까지...
농가 마을의 모든 것들이
어린 나를 엄마의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었던것을 몰랐습니다.

그다지 길지 않았던 시간이어서 기억도 짧지만
수확을 해야 할 과실과 곡식들이 풍요로워질 이맘 때면
더 더욱 그 때의 향수에 젖게합니다. 

- 첫사랑 소묘 -

초가지붕 굴뚝 위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온 들녁을 붉게 물들이고 넘어가는 농촌의 저녁 해는 따스한 포근함을 준다.

꼬리가 더욱 빠알갛게 된 고추잠자리는

어지럽게 날아다니느라 해 가는 줄 모르고,

어디선가 짚단 타는 매케하고 은은한 내음이 온동리를 감싼다.

마을 뒤 편 언덕받이 위로

한 낮 동안 열심히 일 했을 소를 앞세워 몰고

그 느릿한 걸음만큼 무거워 보이는 꼴지게를 메고 할아버지는 돌아오신다.



채전밭에서 저녁에 먹을 푸성귀를 뜯어 동네 우물가로 가시는 할머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촐싹거리며 따라가는 누렁이,

하루종일 혼자 콩대 널어 놓은 마당에서

심심해 어미닭과 병아리만 몰고 다니던 나어린 나는

할머니 뒤를 타박거리며 엄지발가락쪽이 닳아빠진 고무신을 끌고 따라 가다

문득 아랫집 마당을 힐끔거린다.

'귀옥이가 있으려나?'

어깨 위를 한바퀴 빙~ 돌아

널어 놓은 콩대 위로 '탁탁' 소리내며 떨어지는 도리깨질 하시는 아저씨,

하지만 그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귀옥이는 쪼그만게 제 엄마를 도와 밭일도 잘한다

맨날 같이 놀고 싶은데, 항상 저녁이나 되어서야 집에 있다.

서운한 맘에 처진 어깨를 하고 우물에 다다랐을 때

검정고무신 양 손에 쥐고 발을 우물가 돌바닥에 박박 문지르며 씻고 있던 귀옥이가

날 보고 환하게 웃는다.

내 손을 잡아 끌고 이팽떡네 토담 밑으로 가더니

때국 쩔은 무명치마속을 뒤지다 뭔가를 꺼낸다.

"울 언니 어제 서울서 왔다! 너 줄라고 냉겨놨어!".

반절정도 먹고 남겼을 '뽀빠이'봉다리 끝을

검정고무줄로 돌돌 감아 야물게도 묶어놓았다.

"서울 우리집 가면 이딴 거 맨날 먹는데!..."

반가운 한 편 쑥스러움에 어설픈 사양을 하지만,

"글도 먹어 봐! 참말로 맛나다! 히~!

검게 그을린 얼굴 위에 반짝이는 초롱한 눈이 나를 재촉한다.




고개 꺽어 봉다리에 남은 가루 하나까지 입에 털어 넣으면서

눈이 시게 바라보는 농촌의 가을하늘...

뽀빠이맛 나는 나의 첫사랑은 '귀옥'이다.

벌써 9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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