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서울의 한 예비군 훈련장.
직장예비군 훈련이 한창이었다.
연병장 한 모퉁이에는 언제 왔는지 헌혈차량이 대기중이고, 숙달된 조교들의 출석점검이 시작되었다.
저 출석점검이 끝나면 헌혈자를 뽑고 그들을 돌려보낸 뒤 예비군 훈련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아까부터 한 쪽 구석에서 무료하게 나무 막대기로 땅을 파고 있는 선배를 바라보다 결국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 선배, 오늘 피 빼고 바둑 한 수 어때요? >
선배는 뜻밖의 제의에 어리둥절해 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반문을 한다.
< 나 말입니까? >
< 말씀 낮추세요, 저 P고 3년 후배됩니다.>
< 아...그래?........ 어디 근무하지? >
< 금융 기획실요...>
< 그래,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았지?>
< 우리 그룹에서 선배님 모르면 간첩 아닙니까...하하하....>
나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선배가 살짝 눈가를 찡그린다.

그룹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는 선배는 대학시절 이름만 말해도 누구나 아는 바
둑강자였다.
나 역시 선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비서실까지 찾아가서 나 누굽니다하고 선전하기엔 당시 그룹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다.
기업이 아니라 군대에 가까웠다. 
그러나 언젠가 자연스러운 기회가 오면 인사나 한 번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예비군 훈련장에서 인사를 할 수 있는 자연스런 기회가 생긴 것이다.

< 바둑 얼마두지? >
< 선배님이야 누구나 다 아는 강자지만 저야 뭐 물바둑이죠...하지만 얏보시면 안됩니다....이래봬도 정학 당해서 기원에서 한 2년 정도 먹고 살았으니까요...하하하.....>
< 그래??? 그러잖아도 바둑 두고 싶어 몸살이 났는데, 정말 잘됐네.....>

선배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시는 별을 보고 출근해 별을 보고 퇴근하던 시절이었다.
바둑 한 판 두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몰랐다.
일요일에 일부러 기원을 가지 않고서는 바둑 둘 기회가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며칠 전 우리 부서에서 있었던 사건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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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시절, 본사 발령을 거부하고 부산지사에 자원해 근무하던 나는 졸지에 서울로 발령을 받는 횡액을 당하고 말았다.
아내와 맞벌이를 하며 부모를 봉양하며 살던 나는 발령에 강하게 반발했지만 당시 기업 분위기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경쟁사와의 M/S 경쟁에서 불리해진 회사가 T/F팀을 가동하면서 전국에서 이름난 꼴통(?)들을 서울로 불러들인 것이다.

뾰쪽한 묘안이 없던 나는 어서 부산으로 가기 위해 원래의 반골기질을 더욱 개발하여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엄숙한 출근시간 지각은 기본이요, 구두는 항상 구겨 신고 다녔다.
한 번은 엘리베이트에서 그룹 고위층이 이런 나를 본 모양이었다.
하루는 조회시간에 이런 직원이 있다더라는 제하에 설교를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내 이야기였다.
쓴웃음이 나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더욱 골통이 되어갔다.
보수적인 그룹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일만 골라하고 다닌 셈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결국 결정적인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룹 비서실의 김대리때문이었다.
나와는 동기였지만 차수차이가 있어 잘 알지는 못하는 사이였다.
오고 가며 계열사인 우리회사 임원들의 평가를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나도 술자리에서 한 번 이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이 김대리가 우리 부서에 다니러 온 것이다.

점심식사 시간이 끝나고 모두가 조용히 근무하고 있는데 우리 부서 임원과 점심을 함께 한 모양인지 이 김대리가 임원과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며 우리 부서로 들어왔다.
한데 그 해 있는 모습이 영 나의 눈에 거슬렸다.
나에겐 하늘같은 임원인데 주머니에 손을 푹 찌르고 마치 우리 임원과 친구인양 큰 소리로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안하무인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거의 돌고 말았다.

< 어이, 임마, 김대리, 너 이리 좀 와 봐라....>
<,,,,,,,,,,,,,,,>
< 너, 임마 대리 맞지?>
<,,,,,,,,,,,,,,>
< 자석아, 지금 과장님들도 숨죽이며 근무하고 있는데, 대리란 자석이 어디서 떠들어, 임마....비서실이 그리 대단한 곳이가?   아님,  니가 그래 긋발이 좋냐?  응? >
순간 임원들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저 꼴통이 또 무슨 짓을 저지러느냐는 표정이었다.
아니 부서의 모든 직원들이 나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김대리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속사포처럼 퍼붓는 욕설에 그도 속수무책이었다.
욕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나였다.

임원과 부장 과장들의 만류로 그렇게 상황이 대충 마무리됐지만 김대리가 가고 난 후 부서는 한 마디로 난리가 났다.
하지만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보기 싫으면 다시 부산으로 보내주면 되지 않느냐는 거였다.

그날 저녁 간부들이 나에게 술을 샀다.
사과를 하고 오라는 요지의 술이었지만, 나에겐 속이 다 시원했다는 격려의 술로 보였다.
나의 사전에 사과란 없었다.
바둑도 일수불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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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미친놈 널뛰는듯한 나의 행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첫 판도 이상한 행마로 일관하더니 이 판도 그러니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듯 싶은 모양이었다.
< 야, 너 1급 맞냐? >
< 왜 1급 안돼 보이나요?.>
< 그래, 임마.>
< 요새 1급들은 이렇게 두는 거 모르세요?>
< 뭐? >
< 비서실 대리가 임원하고 노는 판인데....>
<.......... 너, 무슨 일 있었구나.....>
< 나중에 한 잔 하면서 말씀 드리죠.....>
< 알았다, 알았으니까 바둑은 제대로 둬라, 임마>

결국 3판을 둬서 내가 두 판을 졌다.
술내기 바둑이었는데 선배는 극구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예비군복을 입고 고주망태가 된 두 놈이 그날 밤 서초동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다녔다.
노래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예비군복을 입으면 누구나 그렇고 그렇다더니 그 말이 헛소문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