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 사라호가 전국을 휩쓸며 천 명 가까운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제주도에도 거센 바람과 비가 몰아쳤습니다.
바다와 산간 곳곳에서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고, 만 채가 넘는 주택이 무너졌습니다.
당시 저는 국민학교 1학년, 여덟 살이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이었습니다.
평소에는 물이 깊게 고여 있을 뿐 흐름이 거의 없던 용연에도 제법 빠른 물살이 생겨 용두암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삼도동과 용담동을 잇는 징검다리도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겁도 없이 앞장서 걷던 저는 징검다리를 건너다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습니다.
나를 구하겠다고 물속으로 뛰어든 사람은 당시 사범학교 1학년이었던 큰누님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이 선명합니다.
물속으로 뛰어들어 내 허리를 껴안고 나를 건져 올리시던 누님의 악문 입술과 결연한 표정이.
서른세 살, 지방청에 근무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청내 테니스코트에서 공을 치고 작은 계단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무릎에 힘이 풀리면서 앞으로 넘어졌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무릎 위의 뼈가 녹아들고 있어 뼈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입원해 수술과 재활을 마치고, 목발을 짚은 채 퇴원하던 날이었습니다.
둘째를 출산한 집사람을 대신해 둘째 누님이 퇴원 수속을 도와주셨습니다.
병원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목발을 짚고 건너기에는 신호등의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빨간불로 바뀐 횡단보도를 향해 시내버스 한 대가 목발을 짚은 저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그 순간 누님은 두 손을 번쩍 들어 버스를 막아섰습니다.
‘내 동생은 내가 지킬 거야.’
그때의 결연한 누님 표정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명예퇴직을 하고 시작한 사업이 제법 잘 풀리던 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얇은 귀가 문제였습니다.
“환 헤지에는 이만한 상품이 없습니다.”
“전혀 위험할 일이 없습니다.”
은행 직원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덥석 서명한 사인 하나가 잘되던 사업을 휘청거리게 만들었습니다.
키코에 휘말린 것입니다.
십일조는커녕 직원들 월급을 마련하기조차 빠듯한 때였습니다.
어느 날 통장을 확인해 보니, 급한 불을 끌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동생들이 제 사정을 알고 보내준 돈이었습니다.
지금 제 기억 속에는
이렇게 동생을 위해 자신을 던졌던 누님들과,
형과 오빠를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동생들만 남아 있습니다.
칠십여 년을 살아오며 좋은 일만 있었을 리 없습니다.
서운한 일도 적지 않았을 것이고,
다툰 적도 많았을 것이고,
서로에게 상처를 준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내 기억에는 서운했던 기억도, 다투었던 기억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더 많이 덮겠다고 이불을 서로 잡아당기며 다투었던 기억도 없습니다.
보리 개떡 한 개를 더 먹겠다고 동생과 다투었던 기억도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쁜 기억들은 하나둘 지워졌나 봅니다.
그래서 지금 제 마음속 그림책에는 좋은 기억들만 담겨 있습니다.
누님들이 나를 위해 몸을 던졌던 순간,
동생들이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던 순간,
‘형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순간들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누님들이 좋습니다.
동생들이 좋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좋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또 많은 것을 잊습니다.
나는 그 많은 기억 가운데 사랑했던 순간들만 오래 간직하고 싶습니다.
나쁜 기억은 지워내고, 좋은 기억만 마음에 남겨두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 형제들의 사랑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늙어가는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만나면 좋습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염려합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서로를 생각합니다.
사랑, 별것 아닙니다.
나빴던 기억은 조금씩 지워버리고, 좋았던 기억은 오래오래 간직하는 것.
그러면 사랑은 신기하게도 저절로 자랍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칠십여 년을 함께 살아온
우리 형제들의 사랑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