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솔비치에 형제들이 모였다.
강남에서, 용인에서, 수원에서, 분당에서 흩어져 살던 형제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팔순에 접어 드신 누님들을 뵐 때면, 칠순에 접어드는 동생들을 볼 때면 무상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진다.
명절과 여름, 매년 서너 번 밖에 만나지 못하는 형제들이 처음엔 조금 서먹하지만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어린 시절의 아이들이 되어 있다.
늙어가는 우리를 다시 어린아이로 만들어주는 사람은 언제나 엄마였다.
“엄마가 그때 말이야…”
누군가 엄마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주위의 공기가 따뜻해진다.
우리는 누구도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팔순의 누님들도, 환갑을 넘긴 막내도, 칠순의 중간을 지나는 나도 엄마를 엄마라 부른다.
엄마라는 두 글자에는 나이도 세월도 없다.
엄마를 부르는 순간 우리는 언제든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솔비치의 밤이 깊어갔다.
반쯤 차오른 달이 바다 물결 위에서 찰랑이고 아직도 식지 않은 바닷바람이 조용히 불었다.
야외 테이블에 둘러앉은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그때 기억나?”
“그걸 어떻게 잊어?”
한 사람이 기억의 문을 열면 다른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열한 명의 형제,
이렇게 열 네 식구가 네 개의 방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돌아보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던 시절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도 어린 시절의 어떤 날들은 마음 깊숙이에 남아 있었다.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지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밥 먹으라, 우리 부르시던 엄마의 목소리는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엄마 이야기를 하실 때면 큰 누님의 목소리가 엄마의 목소리처럼 따뜻해진다.
“우리 엄마가 참 고생 많으셨지.”
그 한마디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말년에 병석에 누으신 엄마는 말 하셨다.
살며 고생은 많았지만 그래도 당신에게는 우리가 남아 있다고.
지금 생각하면 많이 아쉽다.
엄마가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손을 잡아드릴 걸,.
한 번이라도 더 “엄마, 고마워”라고 말할 걸.
우리는 진도에 와서 바다를 보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쉬려고 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오래 한 일은 엄마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마치 엄마를 추억하기 위해 여행을 온 사람들처럼.
우리 기억 속의 엄마는 여전히 젊으시다.
엄마는 환갑을 지난 이듬해 돌아가셨기에,
우리 기억 속의 엄마는 호호백발의 노인네가 아니라 아직은 고움을 간직한 엄마로 남아 있다.
밤이 깊어갈 무렵 큰누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우리 이렇게 모여서 엄마 이야기하니까 참 좋다.”
그 말을 들으며 새삼 형제들이 모이는 것이 좋은지 알 것 같았다.
형제는 같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 사람들이다.
좁은 집에서 옷을 나눠 입고 양말을 나눠 신고 이불 서로 당겨 덮으며 같이 자란 사람들이다.
그래서 형제들을 만나면 잊고 살았던 서로의 기억을 나눌 게 너무 많아 좋다.
“그때 그랬지.”
“맞아. 그랬어.”
그 한마디가 우리를 이어주는 끈이 된다.
나 혼자 기억하고 있다 생각했던 일들이 형제들의 기억 속에서도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같은 어린 시절을 살았고, 같은 엄마를 사랑했다.
그것만으로도 형제는 너무 귀한 인연이다.
아침이 되었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모두의 표정은 밝았다.
밖으로 나가니 햇살 쏟아지는 진도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가 밤 깊도록 엄마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엄마가 들으셨다면 엄마는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까?
아마 웃으셨을 것이다.
자식들이 이렇게 모여 같이 웃고, 서로를 염려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흐뭇해하셨을 것 같다.
추석에 다시 만나자 말하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도 형제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 사이로 아주 오래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얘들아, 밥은 먹었니?”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다시 듣고 싶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 엄마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