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이제... 앞으로는 못 볼 것같아요.

그동안.... 참... 많이 사랑했어요!"

갑작스레 이별을 통보하며

손을 내밀어 어색한 악수를 청하는 그녀의 상기된 표정,

담담함을 가장하려 애 쓰는 모습이 너무도 역력하다.

누군가 세게 뒤통수를 후려친 듯한 느낌에

전신이 굳고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지는데

그런 상황에도 나는 정말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네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항상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만 바라보던 네가..

매사에 고집스럽게 우기며 나 하고싶은데로만 하여도

고분고분 잘 따르며 다 이해해주던 네가..

따스하게 감싸거나 다가서지 않고

그동안 너무도 무심하고 철없이 굴었던 내게 너무 지쳤던 것일까!

돌아서서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적지않은 시간을 함께 한 그녀에게

너무도 소홀했었다는 후회나 자책보다는

뭔가 짐을 하나 내려놓은 듯한 안도감이 더 컷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거의 10억km에 가까운 태양의 둘레를

서른바퀴나 내달린 세월이 지난 지금

우연히 듣게 된 노래 한 곡에

새삼 너무도 어려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기실 오늘에서야 떠오른 그녀가 아니고

때가 되면 한번씩 심하게 앓게 되는 몸살처럼

통증은 조금씩 덜하지만 수 년을 간격으로 나는 그녀를 앓았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세월는 또 얼마나 그녀를 변하게 하였을까!

그러면서도 언젠가 한번쯤은 그녀를 보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새삼 거울 앞에 서면 

샤프하고 총기있던 젊은 날의 나는 간 데 없고

그녀가 봐도 전혀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늙수구레한 낯설은 얼굴이 우울한 표정으로 있다

마음이 허해지면 나는 가끔 집 앞 천변을 걷는다.

산책로변 우거진 갈대, 강아지풀, 낮게 나는 잠자리들

어느 것 할 것없이 다 옛날의 그 것인데

폴짝폴짝 가위걸음으로 뛰었던 어린 나는

힘겨운 듯 느릿한 걸음으로 발 아래를 살피며 걷고 있다

화창한 그 옛날의 여름 한 때

뒤안 감나무아래 장독대 옆 화단에 핀 채송화.봉숭아 꽃 씨를

고사리같은 손으로 받던 나는

이제 세월이 주름으로 덧 쌓인 손으로

황혼 빛 아래 도심의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어루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