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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자 계보로 본 한국 현대바둑 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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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자 계보로 본 한국 현대바둑 70년
| 정용진 2016-12-06 오후 05:06 [프린트｜스크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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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기사’ 조훈현이 끌고 ‘원조 알파고’ 이창호가 세운 한국바둑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 벌어지는 동안 전국의 중3 엄마들이 난리가 났다고 한다. “알파고가 어디에 있는 고등학교냐고...” 인공지능 알파고가 던진 충격과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하는 우스갯소리다.
28년 바둑기자로 뛰면서 대국 현장에 들어가 취재하지 못한 것도 처음이다. 500명에 이르는 내외신 기자들이 쇄도하면서 불상사를 우려한 구글팀은 사진 풀기자 2명을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대국장을 통제했다.
1980년 조치훈 9단이 명인에 올라 일본바둑을 제패했을 때, 1989년 조훈현 9단이 응씨배를 우승하며 초대 바둑황제에 등극했을 때 전 국민이 환호한 바 있다.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홍수환 선수처럼 당시 조훈현 9단도 김포공항에서부터 마포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쳤고, 이것이 바둑사 최초이자 마지막 카퍼레이드일 만큼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이세돌 9단-알파고 대결’에 쏠린 관심에 비하면 ‘동네잔치’ 수준일 뿐이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은 세계적인 관심사였다. 이세돌-알파고 대결이 벌어지는 기간 ‘불계패’ 같은 바둑의 기본용어가 검색어 상위권에 올랐다. 바둑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열광했다는 얘기다.
결과는 1승4패로 졌지만 이세돌 9단은 “박정환 9단(한국랭킹 1위)이나 커제 9단(중국랭킹 1위)이 알파고와 한 달 이내에 5번기를 한다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알파고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며 아쉬워했다. 진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기에 ‘경적(輕敵)’하다 ‘필패(必敗)’한 면이 있었다. ‘인간대표’ 이세돌이 진 직후 충격에 휩싸인 한중일 바둑계가 알파고를 만든 구글에게 재대결을 요구했다. 구글은 가타부타 말을 않다가 8개월여가 지나 “내년(2017년) 초 한번 더 인간 최고수와의 대결을 고려하고 있다”는 설을 흘렸다. 드러난 약점을 반년 동안 보강하였고, 이제는 인간을 2점 접을 만한 실력으로 올라섰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만약 구글이 도전장을 받아들여 재대결이 성사됐을 때 이세돌 대신 누가 나가든 바둑의 역사, 한국바둑 일인자의 계보에 대해 알고 관전한다면 훨씬 흥미진진할 것이다.
한국의 현대바둑은 1945년, 광복하던 해를 기점으로 잡는다. 크게 개척기(1945~1960년), 발아기(1960~1970년), 성장기(1970~1990년), 황금기(1990~2000년), 무한경쟁기(2000~현재)로 나눌 수 있다. 개척기의 절대강자는 조남철 9단이었으며, 발아기에는 김인 9단이, 성장기를 지배한 기사는 조훈현 9단이었다. 이후 이창호 9단의 등장으로 최고 황금기를 누렸으며 새천년을 넘어서서는 이세돌 9단을 축으로 중국기사들과 정상을 다투는 무한경쟁을 펼치고 있다.
“조남철이가 와도 안돼!” 현대바둑 개척한 조남철
1945년, 모두가 해방의 기쁨에 들떠 있을 때 바둑판을 메고 대중 속으로 들어간 스물두 살 청년이 있었다. 바둑이 한갓 잡기로 취급되던 시절, 청년은 바둑으로 나라에 이바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노(老) 국수를 중심으로 열여섯 점을 미리 배치하고 두는 순장바둑이 두어지고 있었지만 바둑의 대중화와 장차 국제화를 내다본 청년은 자유포석제인 현대바둑 보급에 앞장섰다. 청년의 이름은 조남철. 우리나라에 현대바둑의 씨를 뿌린 그를 바둑계에선 ‘현대바둑의 아버지’라 부른다.
나이 열 살 때 한국을 방문한 기타니 미노루(木谷實)에게 7점 지도기를 받은 인연으로 1937년 그의 내제자로 들어간 조남철은 1941년 열여덟 살에 조선인 최초로 일본기원 프로기사가 되었고 해방 1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현대바둑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그를 이길 기사는 없었다.
1956년, 동아일보가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기전인 국수제1위전(현 국수전의 전신)을 만들었고 초대 국수에 오른 조남철은 이후 9기 연속제패하며 독주시대를 구가했다. 1958년 창설한 ‘왕좌전’에선 연속 4회 우승, 1960년에 만든 ‘최고위전’을 7년간 제패하는 등 통산 타이틀획득 30회를 기록했다. “바둑두는 사람 어딜 갔나? 천하의 조남철이가 와도 안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20여년간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승부세계에 영원한 강자는 없는 법. 두꺼운 얼음 아래에서 젊은 후학들이 졸졸 소리내며 흐르고 있었다.
▲ 중후한 바둑으로 조남철의 20년 독주를 저지한 김인. 사진은 71년 1월, 15기 국수전 도전4국 장면. 왼쪽이 김인이다. ⓒ 한국기원 제공
조남철 20년 아성 허문 청년 김인의 혁명
4.19가 일어난 60년대는 혁명의 시대다. 바둑계에도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조남철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스물세 살 청년 김인이 20년 조남철 아성을 무너뜨렸다.
김인은 1943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생시절 하굣길에 우연히 바둑두는 걸 보고 빠져들면서 중1 때 서울로 유학 왔고, 3년 만에 입단(1958년)했다. 다시 입단 3년 만에 4단이 된 그는 최고위전에서 일인자 조남철에게 패기 있게 도전했으나 3-2로 분루를 삼킨다. 이때 “일본에 가면 연구생 최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란 주변인의 말에 자극을 받아 1962년 기타니 문하로 들어갔다.
김인의 기재가 어떠했는가는 당시 일본기원이 별도로 입단대회를 거치지 않게 하고 3단을 인정해준 파격에서 알 수 있다. 일본의 오다케(大竹英雄), 대만의 린하이펑(林海峰), 한국의 김인의 성을 따 김죽림(金竹林)시대의 도래를 예고할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올리다가 돌연 1년 8개월 만에 귀국해 조남철 아성을 위협했다.
조남철의 나이 어느덧 40대 중반, 20년 연하의 젊은 도전자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김인은 1966년 10기 국수전에서 조남철의 10기 연속 제패를 저지하며 김인시대를 선포했다. 이후 세 번에 걸친 조남철과의 리턴매치를 모두 이기며 6년간 국수를 제패했고, 역시 조남철을 밀어내고 오른 초대 왕위를 7기 연속 우승, 패왕을 5연속 석권하는 등 조훈현이 등장하기까지 10년간 일인자로 군림했다. 통산 우승횟수 30회로 조남철과 같다.
▲ 일본에서 돌아온 조훈현은 김인의 둔중한 방패술을 현란하고 예리한 창검술로 뚫고 이후 15년 반상권력을 누렸다. 사진은 1974년 최고위전 시상 장면. 오른쪽 상패를 든 젊은이가 조훈현 9단이다. 최고위전은 조훈현이 당시 최강자 김인 9단(왼쪽)을 꺾고 처음으로 딴 타이틀이다.
“조훈현이 있었기에...” 70~80년대 한국바둑 견인한 ‘바둑황제’
사람들이 바둑기자로서 지켜본 프로기사 가운데 누가 최고의 천재기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을 때 망설임없이 일순위에 놓는 이름 조훈현. ‘불세출’이라는 수식어를 반드시 붙여야만 하는 승부사다. 아홉 살 입단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세계 최연소 입단기록이다. 세 번의 전관왕(80년 9관왕, 82년 10관왕, 86년 11관왕). 한국 최초 9단 승단(1982년). 타이틀전 최다연패 기록 보유(77년부터 93년까지 패왕전 16연패). 통산 타이틀획득 160회. 세계대회 우승 11회...
70년대에 들어서며, 한국바둑은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드는 듯했다. 김인의 뒤를 이은 윤기현, 하찬석 같은 도일(渡日) 기사들이 속속 돌아오며 김인시대를 흔들었다. 도일 유학파만 있었던 게 아니다. 4기 명인전 도전기에서 조남철을 3-1로 꺾고 명인에 오른 열아홉 살 서봉수 2단의 등장은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사람이 개를 문 사건’에 비유할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바둑의 봄’은 천재 조훈현이 병역의무차 귀국하면서 춘몽에 그쳤다.
조훈현은 1974년 14기 최고위전에서 김인을 3-0으로 제치고 첫 타이틀을 딴 이후 제자 이창호에게 밀려나는 90년대 초까지 15년 장기집권시대를 이어갔다. 특히 1989년 1회 응씨배 우승은 변방국 취급을 받던 한국바둑의 위상을 일거에 뒤바꾼 분기점이자 단숨에 세계최강국으로 올라서게 한 도약대였다. 한국바둑이 마이너리그로 대접받을 때 조훈현은 한국바둑의 실력과 위상을 견인한 것뿐 아니라 내제자 이창호를 키움으로써 국제경쟁에 대비한 공로 또한 높이 평가받고 있다.
▲ 그토록 날렵하고 빠른 조훈현의 발놀림을 잡은 건 제자 이창호의 '무딘 칼(鈍刀)'이었다. '느림'이 '빠름'을 제압하며 '돌부처의 시대'를 열었다. 사진은 1991년 11월8일 한국기원에서 둔 35기 국수전 도전5번기 최종국 모습. 새로운 시대를 여는 장면이다. 왼쪽 대국자가 이창호 9단.
‘세계가 이창호를 좇는 시대’를 만든 원조 알파고
90년대는 한국바둑이 세계최강국으로 우뚝 선 황금기다. 조훈현이 한국바둑을 최강의 대열로 견인했다면 바통을 이어받은 제자 이창호는 한국바둑을 독보적인 강국으로 세워놓았다. 이 시기 세계최강의 사제, 조훈현 이창호를 원투펀치로 보유한 한국바둑은 서봉수, 유창혁이 가세한 4인방 진용을 내세워 세계대회를 휩쓸었다.
황금기를 이끈 주장은 ‘철의 수문장’ 이창호였다. 1989년 열네 살에 KBS바둑왕전을 우승하여 세계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을 세운 데 이어 1993년에는 불과 열여섯 살의 나이로 3회 동양증권배를 제패하며 최연소 세계챔피언에 올라 세계를 경악하게 한 이창호는 하늘이 한국바둑에 내린 선물이었다.
스승 조훈현과는 국제무대에서 더없는 콤비플레이를 펼쳤지만 국내무대에서는 일인자 자리를 두고 바둑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5년에 걸친 공방전을 펼쳐야 했고, 이 ‘사제 백년전쟁’에서 완승(69번의 타이틀매치에서 49승20패)을 거두고 바야흐로 ‘세계가 이창호를 좇는 시대’를 만들었다. 통산 타이틀 획득수 140회로 스승을 넘어서진 못했으나 세계대회에서 거둔 우승 21회 기록을 경신할 기사는 상당기간 나오지 못할 것이다.
▲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이창호 왕국도 새천년(2000년)에 들어서며 기울기 시작했다. 승부세계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신성 이세돌(오른쪽 대국자)은 2003년 제7회 LG배 결승4국에서 이창호를 3-1로 누르고 '센돌시대'를 활짝 열었다.
‘센돌’ 이세돌시대 저물면서 무한경쟁시대 돌입한 세계바둑
열흘 붉은 꽃 없고 10년 넘기는 권세 없다던가. 두터움이란 영역에 눈을 뜨게 하고 균형과 계산바둑으로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던 이창호 왕국이 새천년에 들어서며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둔도(鈍刀) 이창호의 날을 무디게 만든 주인공은 오지 비금도에서 올라온 섬소년 이세돌. 2001년 봄, 이미 국내 2관왕에 올라 있던 열여덟 살의 이세돌이 5회 LG배 결승전에서 이창호를 막판까지 몰아넣는 분전을 펼쳐 주목을 받더니(첫번째 대결에서는 2-3으로 역전패했지만) 2년 뒤 다시 맞붙은 7회 LG배 결승5번기에서 3-1로 이창호를 눕히고 후지쯔배에 이어 단숨에 두 개의 세계대회를 석권했다.
여전히 세계대회 4관왕의 위용을 자랑하던 이창호였다. 이때까지 11번이나 치른 세계대회 결승5번기에서 단 한번 진 적 없는 무적함대였기에 파장이 더욱 컸다. ‘쎈돌’ 이세돌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2002년 후지쯔배를 시작으로 이세돌은 매년 세계대회 우승행진을 펼쳐 통산 18회 우승기록을 쌓았다. 세계대회 통산 21회 우승을 거둔 이창호를 바짝 뒤쫓는 눈부신 성적이다.
이러한 이세돌의 시대도 승부세계의 급속한 세대교체 회오리에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2012년 이후 이세돌은 세계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하고 있으며 이 사이 열 살 어린 박정환 9단에게 랭킹1위 자리를 내주었다. 2016년 7월 현재 박정환은 32개월 연속 랭킹1위를 달리며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글로벌시대를 맞은 바둑은 이미 국가간 경계가 무의미해졌고 국내, 국외 기사 구분이 무색한 무한경쟁시대에 돌입했다. 아, 또 있다. 이전에 보지 못한 ‘센놈’ 알파고라는 인공지능까지 나타났다. 점입가경(漸入佳境), 반상의 전쟁이 더욱 재미있어졌다. <2016 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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