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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뭉크의 절규처럼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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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뭉크의 절규처럼 (15)
2014-01-02 조회 8069    프린트스크랩
▲ 영화 '소녀' 포스터.
          

           
전야(前夜)

호철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머리 속이 복잡했다. 아무리 무뎌 터진 호철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복잡한 머리 속에 소녀가 말한 힌트의 의미까지 더해진다. 그 의미를 해석하느라 머리를 쥐어짜본다.


사소취대(捨小取大):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그 뜻을 현재 상황에 대입해본다. 작은 것은 뭐고 큰 것은 뭔가. 버리는 건 뭐고 취하는 건 뭔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용량초과로 마비될 지경이었다.


소녀 역시 호철과 마찬가지로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녀의 아파트는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불은 새벽 3시가 넘어서 꺼졌다. 소녀의 아파트에 불이 꺼지자 호철도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다.


악몽이 밤새 호철을 괴롭혔다.

 

그날
12시간 전

제주해협 남쪽에서 빠르게 북상중인 태풍 지니가 한반도를 강타할 예정이므로 각별한 주의를 당부한다고 아침부터 기상청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8시간 전

반장의 얼굴은 마치 칠면조처럼 시시때때로 변했다. 눈을 커다랗게 뜨다가 입을 쩍 벌리고 급기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열 장 분량의 보고서 중 아홉 장째를 넘기는 중이다. 반장의 책상 맞은편에 앉은 호철은 그런 반장을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보고서를 다 읽은 반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무슨 말을 할지는 뻔하다. 그 뻔한 말을 하는 반장이다.

 

“이거 사실이야? 팩트 맞아?”


“사실 그대로입니다.”


“이제 겨우 열여덟 살 여자애가 연쇄살인범이라고?”


“네.”


“공교롭게 자네 아파트 앞동에 산다고?”


“네.”


“자네한테 자신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고?”


“네.”


“그리고 또 누굴 죽였다고?”


“집안에 든 강도를 죽였습니다. 그건 5년전 사건입니다. 당시에는 유리애란 여자의 아버지가 죽인 걸로 사건이 종료됐습니다. 물론 유리애의 아버지는 강도에게 살해됐습니다.”


“그때 그 여자애 나이가 몇 살이야?”


“열세 살입니다.”


“열세 살짜리 여자애가 강도를 칼로 찔러 죽였다? 그걸 믿으라고?”


“믿든 안 믿든 사실입니다.”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급기야 반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경찰로서 할 말이야! 이런 어처구니없는 보고서를 올리면서 그 흔한 증거물 하나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걸 믿으라는 거야!! 지금 소설 써?”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게 뭐야.”


“살해된 강무세의 혀입니다.”


“강무세의 혀?”


“강무세의 절단된 혀에는 범인의 침이 묻어있을 겁니다. 거기서 추출한 DNA와 유리애의 DNA가 일치한다면 움직일 수 없는 증거물이 됩니다.”


“그래. 좋아. 그럼 그 유리애인지 뭔지 하는 여자애 DNA는 뭘로 검사할거야. DNA 검사는 영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거 몰라? 이런 소설 같은 보고서로 판사한테 영장을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중으로 당나귀 싸이트 상세 주소가 나옵니다. 그거면 영장을 받아내는 데는 무리 없을 겁니다.”

 

반장은 보고서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 호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핵폭탄이야. 알아? 핵폭탄! 이런 사건은 말 그대로 전대미문이야.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사건이라구. 이게 사실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넌 영웅이 되는 거야. 반대로 이게 사실이 아니면 옷 벗을 각오해야 돼. 자신 있어?”

 

호철은 대답대신 반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특유의 바위 같은 눈빛이다. 반장이 호철한테 맘에 드는 건 그 눈빛이었다. 그 바위 같은 눈빛은 단 한번도 반장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좋아.”


반장은 불끈 쥔 두 주먹을 책상위에 올리며 말을 이었다. 반장이 뭔가를 결심할 때 나타나는 습관이다.

 

“김형사하고 장형사를 붙여줄 테니까 같이 움직여.”


“아닙니다. 저 혼자하겠습니다.”


“임마, 아무리 여자애라고 하더라도 연쇄살인범이야. 혼자는 안돼. 너 혹시 독식하겠다는 생각이야?”


“공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아이가 그걸 바라는 것 같습니다.”


“뭐를? 너 혼자 체포해주기를?”

 

호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하고 같이 그 아이 손에 수갑을 채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민형사도 제외시킨 겁니다. 물론 공로에 대한 부분은 민형사와 같이 할 생각입니다. 그건 이미 보고서에도 작성돼 있습니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쳐. 네놈이 공로 같은 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럼 혹시 다른 뜻이 있는 거 아냐?”


“무슨 뜻 말입니까?”


“혹시...너 그 여자애한테 무슨 이상한 감정 같은 거 있는 거 아냐?”


“반장님!”


호철의 목소리가 커진다.

 

“그럼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봐. 설명을.”


“솔직히 연민정도는 있지만 그 이상은 없습니다.”


그래도 못믿겠다는 듯 반장은 호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호철은 반장의 눈빛을 피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몹시 쑥스러운 말투다.

 

“전...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호철의 말에 반장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자를 돌처럼 여기는 놈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이건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자신도 모르게 반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뭐야? 누구야?”


“최근에 만난 사람입니다.”


“최근에? 그럼...”

 

반장은 눈이 거의 튀어나올 정도로 커지면서 말했다.


“민형사?”


호철은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핫하하하...이 자식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구먼.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두 사람 잘 어울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감사합니다.”


“그래. 올해 안에는 우리 호철이 국수 한번 먹어보자구.”


반장의 말에 호철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런 호철의 얼굴을 보고 반장은 한바탕 크게 웃고 말을 이었다.

 

“좋아. 오늘 혼자 움직여. 대신 실수는 용납 안돼. 무슨 말인지 알아? 네놈 인생이 걸린 사건이야. 잘못되면 민형사하고 결혼도 물 건너간다는 각오로 움직여. 대어를 잡아. 그럼 내일 눈을 뜨면 넌 영웅이 돼있을 테니까.”

 


5시간 전

태풍이 온 세상을 미친 듯이 할퀴고 있었다.


호철의 머리 속에는 온통 ‘사소취대’란 네 글자로 가득 차있었다.

 

4시간전

카톡이 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민석훈 선생님하고 같이 컴퓨터를 배우는 수강생 이미선입니다 전화를 드리는 게 예의지만 제 사정 때문에 이렇게 문자로 대신하는 점 미리 양해드립니다 사실 얼마전에 선생님한테 제 문제를 상의한 적이 있는데 따님이 경찰이라면서 전번을 주셔서 이렇게 문자드립니다 오늘 만나 뵙고 상의를 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어떠신지요>

 

어제 아빠가 말한 그 여자인 모양이다. 요즘 애들답지 않게 문자에서 예의와 교양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아빠한테 얘기 들었어요 오늘 7시쯤 만나죠>


<네 어디서 뵐까요>


<그쪽에서 정하세요 편한 대로>


<종로 어떠세요?>


<아는 곳 있나요>


<종로 3가에 힐탑이란 칵테일바가 있는데 혹시 아세요?>


<제가 찾아가죠>


<그럼 7시에 힐탑에서 뵐께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 꾸벅>

 

3시간 30분 전

사소취대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한다는 의미에서는 더이상 어떤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호철은 사소취대의 한자를 바꿔서 단서를 찾아보기로 한다.

 

‘사’의 한자는 총 196개


‘소’의 한자는 총 112개


‘취’의 한자는 총 28개


‘대’의 한자는 총 49개


벌써 두 시간째 각 한자를 조합하고 있는 호철이다. 역시 마땅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제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그때 민규한테 전화가 왔다. 녀석은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형! 당나귀 싸이트 상세 주소가 나왔어. 어딘지 알아? 놀라지 마. 형 아파트 바로 앞동이야! 105동 1304호!”


“그거 당장 공식 문서로 작성해서 팩스로 보내.”

 

3시간 전

영장이 떨어졌다.


2시간 30분 전

마치 길고 긴 마라톤의 결승점을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몇 걸음만 달리면 결승 테이프를 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몇 걸음이 쉽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다. 그렇게 호철은 소녀의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망설였다. 인터폰을 누르고 소녀가 나오면 범죄 사실과 미란다의 원칙을 말하고 손에 수갑을 채우면 된다.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그 간단한 일이 지금까지 경찰생활 중 가장 힘든 일이다. 그 무심한 소녀의 눈을 어떻게 봐야할지 막막했다. 그래도 어쨌든 해야 할 일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호철의 손이 벨을 눌렀다.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두번, 세번 벨을 눌렀지만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조금전 무거웠던 마음이 긴박하게 바뀐다. 부랴부랴 열쇠공을 부른 호철은 아파트를 강제로 열고 들어갔다. 소녀는 없었다.

 

2시간 전

태풍 때문인지 거리에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종로3가에 있는 힐탑은 꽤 오래된 칵테일바였다. 바로 도로 옆에 있어서 찾기도 쉬웠다. 조명이 어두운 가게 안에는 여자 재즈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빌리 홀리데이의 I’m a fool to want you다. 지현은 약속시간 5분전에 도착해서 스툴바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선이란 여자는 아직 오지 않았다.

 

1시간 55분 전

빌리홀리데이에 이어 다미타 조의 a time to love가 끝날 무렵 그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어둠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모델처럼 큰 키였다. 타이트한 민소매 검정색 터틀넥 미니원피스에 빨간 스틸레토힐을 신은 여자였다. 가게 안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여자에게 쏠렸다. 당연했다. 블랙과 레드의 조화 속에 하얗게 드러난 긴 팔과 긴 다리는 같은 여자가 봐도 아찔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지현은 저 여자가 이미선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 않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어깨에 걸린 빨간색 샤넬 숄더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문자는 지현에게 왔다.

 

<이미선인데요 혹시 스툴바에 앉아계신 분이신가요?>

 

지현이 손을 흔들자 여자가 걸어왔다. 패션만큼이나 매혹적인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지현은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여자라면 스토커가 한명이 아니라 수백 명이라도 당연하게 생각될 것이다. 여자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지현의 옆 스툴에 엉덩이를 걸쳤다.

 

“반가워요. 민지현이어요. 참, 말은 들을 수 있나요?”


지현의 말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표정이 없었다.

 

“일단 뭐 마실까요? 뭐로 할까요?”


지현의 말에 여자는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낸다.

 

<전 싱가폴슬링 할게요>


“그래요. 그럼 나도 같은 걸로 하죠.”


지현이 빙긋 웃으며 말을 했다. 지현의 웃음에도 여자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1시간 25분 전

호철의 연락을 받고 형사 두 명을 달고 달려온 반장은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내가 뭐라고 그랬어!! 네놈 인생이 걸린 문제니까 실수가 있으면 안된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잖아. 유리앤지 유리창인지 그년 언제 튀었대. 목격자가 있을 거 아냐. 목격자가.”


“경비원 말로는 점심때쯤 나갔답니다.”


“차 있어?”


“없습니다.”


“그럼 뭐로 움직인 거야.”


“경비원 말로는 가끔 택시를 불러서 탔다는데 오늘은 그냥 갔답니다.”


“당장 택시회사 조회해봐. 그리고 집안을 다 뒤져! 뭐라도 단서를 찾아보란 말이야!”


반장의 호통에 따라온 형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호철은 몸이 아니라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사소취대.


소녀가 내준 힌트는 바로 이 상황을 뜻한 것이다. 사소취대에서 자신을 찾아보라는 힌트가 들어있다. 문제는 힌트의 난이도다. 아이큐 178의 소녀의 수준에서 푸는 힌트라면 보통사람에게는 이미 힌트가 아니다. 분명히 호철이 풀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로 힌트를 가르쳐 줬을 것이다. 한자의 뜻을 바꾸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네 글자를 전부 바꾼다면 범위가 너무 넓다. 사소취대에서 동사(動詞)를 놔두고 목적어(目的語)만 바꾼다면.

 

목적어는 ‘소’와 ‘대’ 두 글자다.

‘소’는 총 112개


所,小,蘇,消,素,少,訴,燒,蔬,紹,騷,昭,疎,掃,笑,召,沼.巢,韶,塑,逍,邵,梳,


遡,蕭,簫,炤,溯,疏,宵,銷,嘯,搔,瀟,甦,瘙,篠,佋,傃,劭.卲,咲,嗉,喿,埽,嫊,


尕,厼,弰,愫,慅,愬,捎,旓,柖,榡,樔,櫯,櫹,毜,氉,泝,溞.溸,漅,潲,焇,㷌,熽,


牊,玿,琑,璅,痟,㸴,穌,笤,筲,筱,箾,綀,縤,繅,翛,膆,艄.艘,莦,萷,蛸,䖻,螦,


蟰,蠨,袑,謏,踃,踈,䟽,輎,鄛,酥,霄,颾,𩷲,髾,魈,鮹,鯂.鱢,𣜮,𦢩


‘대’는 총 49개


大,對,代,帶,臺,隊,待,貸,垈,袋,戴,岱,擡,玳,黛,坮,㐲,儓,嬯,帒,廗,㣕,憝,懟,旲,柋,檯,汏,濧,瀩,瀻,瑇,㿃,碓,祋,籉,艜,薹,薱,襨,襶,譈,蹛,軑,轛,鐓,鮘,釱,𣴘


112개와 49개의 조합. 이것 역시 머리가 터지는 건 마찬가지다.

 

55분 전

이미 거리는 짙은 어둠에 묻혀 있었다. 태풍이 가로수를 부러트릴 기세로 몰아치고 있었다.


싱가폴의 노을이란 뜻의 싱가폴슬링은 진과 체리쥬스를 브렌딩한 칵테일이다. 알코올 도수 17도로 꽤 높지만 달콤한 맛이 여자들이 좋아하는 칵테일이다. 지현과 여자는 벌써 한잔을 비우고 두 잔째를 앞에 놓고 있었다. 취기 때문인지 여자와의 독특한 대화 때문인지 지현은 꽤 기분이 좋았다.

 

<5년전에 사고로 말을 잃었어요 그때 부모님도 돌아가시고요 병원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죠 어쨌든 이젠 별로 불편한 건 없어요 이렇게 문자로 대화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정말 다행이야.”


지현은 여자에게 말을 놓았다. 여자가 편하게 말을 놓으라고 했다. 하긴 열세 살 차이면 말을 놓는 게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현은 말을 끊고 칵테일을 스트롱으로 빨아들였다. 달콤한 향기가 입안 가득한 게 기분이 좋았다. 이미 두 잔째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항상 술을 성급하게 마시는 지현이다. 칵테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선이 문제를 얘기해볼까. 그 스토커란 사람 말이야. 어떤 사람이지?”


<삼십대쯤 되는데요 항상 집근처에서 기다려요 그리고 쫓아와요 딱히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는 건 아니어요 그냥 따라다녀요>


“얼마나 됐지?”


<1년쯤 됐어요>


“그 남자 어디 사는지는 알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건 아는데 정확히는 몰라요>


“지금 사는 데가...”


지현은 말을 끊었다. 말을 하려고 하는데 머리 속에서만 웅얼거렸다. 옆에 앉은 여자가 마치 딴 세상에 있는 걸로 보였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몸이 무거웠다. 지현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머리가 자꾸 밑으로 쳐졌다. 핸드폰에서 계속 여자의 문자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것을 볼 기력조차 없었다. 바텐더가 지현의 몸을 흔들면서 뭔가를 말했지만 몸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조금전 여자가 두번째 칵테일을 지현에게 밀면서 손바닥에 감춰진 하얀 가루약을 칵테일 안에 넣는 걸 지현은 보지 못했다. 하긴 보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여자의 손은 교묘하게 조명의 그림자 속에 감춰져 있었다. 가루약은 항우울증제다. 항우울증제는 졸음과 심한 무기력증을 가져온다. 물론 약의 양에 따라 그 정도가 심해지는 건 당연하다. 여자가 항우울증제를 구하는 건 약국에서 아스피린을 사는 것보다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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