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구한말에서 걸어나온 바둑.
2. 사동궁 기원.
3. 바둑을 좋아하던 의친왕.
4. 이학진선생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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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이학진 선생을 그리며


일본의 조선 침탈과 철수 과정의 시간은 대략 60년 2세대에 걸쳤다. 그 시간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이 시대에 바둑계를 움직인 사람들이 있다.

전기: 조병휘 한상룡 이인직.

후기:  최린 채극문 권재형.

이들은 재력가나 문필가 그리고 바둑의 기력과 독서량을 함께 갖춘 인텔리로서 바둑 마니아라는 공통점이 있다. 각자의 재능과 재력을 내어 나름의 바둑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

이 시대 조선의 바둑 고수군이 대략 70여 명 밝혀졌는데 전후기로 보면 다음과 같다.

전기: 유풍기 백남규.

후기: 노사초 권재형.

백남규와 노사초는 차치하고 권재형은 경상도 함양 출신의 고수로 조남철이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조선위기선수권 결승전에서 이기기도 하는 등 구한말 고수들의 자존심을 엿보게 한 강자였다.

게이오대학 재학시절의 선생(좌)

이학진 선생은 이런 시대에 일본에 유학을 갔다.

선생이 입학을 한 대학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게이오대학으로 조선 유학생들이 다수 유학을 와 있었다. 선생은 일곱 살 무렵 큰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웠다고 했다. 선생은 그때 무치석바둑과 배치석 바둑을 함께 배웠다고 했다.

선생은 대학시절 교내 바둑구락부의 주목을 끌 정도의 기력이 있었다. 선생은 게이오대학 대표로 도쿄 대학연맹전에도 참가를 한다. 이때 게이오대학과 인연이 있던 일본 전문기사 '사카다'에게 지도대국을 여러 판 받기도 한다. 선생은 일본기원으로부터 아마초단을 인허받기도 했다. 선생의 한국바둑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어 끝내 패트런(patron, 예술후원자·보호자)로 발전한다.

선생은 한국기원 초창기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하신 분이다. 사동궁 조선기원의 설립과 6.25 이후 파괴된 사회 속에서 이사장을 맡았던 장경근과의 교통으로 대만 원정 교류전을 전개하는 등 조남철 선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분이다. 선생이 유년의 조훈현의 일본 유학을 지원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다.

선생은 소년 조훈현의 일본 유학을 지원하기도 했다.
조훈현 부자와 함께. (자료사진/월간바둑)

필자는 2004년 가을 전주이씨 종약원에서 개최한 '조선왕실 예우에 관한 세미나'에 갔다가 선생을 뵌 적이 있다. 당시 힘들게 살고 있는 의친왕 영친왕의 후손들을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냐는 문제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은 세미나의 앞자리에 앉아 꼿꼿이 경청하고 계셨다. 필자는 휴식시간에 차 한잔을 가져다 드린 후 질문을 드렸다.

"김만수 국수가 실존 인물인지요? 혹시 본 적은 있으신지요?"

선생은 망외의 자리에서 망외의 질문을 받고 놀라는 표정이셨다. 그리고 선생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뵌 적은 없고 노국수들에게 말은 들었지요."

필자가 바둑사를 궁금해하면서 가장 이해 못한 대목 하나가 김만수다. 조선말기 최고수였다는 김만수는 생존기록이나 실존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없는 미스터리의 인물이다. 그냥 전설같은 풍문에 의지하여 떠도는 김만수를 선생에게 묻고 그런  대답을 받았다.

필자는 더는 질문을 드리지 않았다. 장소가 편하지 않았고 딱히(?) 질문할만한 다른 의문도 없었다. 선생은 자신의 살아온 길에서 이미 모든것을 말했다. 선생이 뿌린 씨앗은 발아하여 한국바둑의 큰 성과로 나타난 지 오래이기도 하다. 선생은 조남철 선생의 큰 우군이었다. 그런데도 선생은 한편으로 구한말의 노국수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직언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구한말의 바둑사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한국바둑은 어느날 하늘로부터 뚝 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다. 조남철 선생이 일본에서 바둑을 배워와 오늘날의 한국바둑을 만들었다는 것도 얼척 없는 말이다. 어제가 없는 오늘의 역사는 없다. 역사는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어제가 발전하여 오늘이 된 것이다. 구한말 60여년의 잃어버린 시간 속에 침몰하여 숨도 못쉬고 있는 '한국바둑사'가 있다. 누가 그것을 견인해 올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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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아래의 자료는 구한말의 기보입니다. 이 시대의 바둑은 거의가 묘수풀이라는 과정을 통해야만 고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듯합니다. 끝 페이지에 보이는  소장자의 감회가 담긴 한시 한편이 새록새록 다가옵니다. 이 자료는 70만원에 고서경매장에서 낙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