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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戀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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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산기슭을 배회하던 외로운 바람의 입맞춤이었을까. 가만히 얼굴에 와 닿는 차갑고 싱그러운 느낌에 눈을 뜬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여섯 시 전. 창밖에는 아직 햇살의 기척이 없고 옆방, 건너편 방에서, 수학여행 첫날밤의 아이들처럼 밤새 도란거리던 젊은 친구들도 새벽녘에 떠난 꿈나라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은 듯 조용하다.
임선근 9단은 타고난 건강체질. 엊저녁 산책에서 돌아와 이부자리에 누운 채로 10여분쯤인가 TV 사극을 보는 듯하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낯선 곳에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쉽게 잠을 청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꽤 부러운 재능(?).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과 어울렸던 최창원 6단과 김수장 9단도 언제 돌아왔는지 곤히 잠들어있다.
방 한쪽에 마련된 세면실에서 세수를 하고 둘러보니 제각기 자유롭게 누워 잠든 세 사람의 얼굴이 소년처럼 맑다. 자연의 품 안에서 나이가 무슨 소용이랴. 꿈을 꾸는 사람은 모두 아름답다.
방충망이 붙은 미닫이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가 월악의 아침을 맞는다. 부드러운 바람, 크리스탈의 울림처럼 투명한 새소리, 수줍은 오월의 신부인양 우윳빛 드레스를 걸친 산기슭의 나무들도 일제히 손을 흔들며 아침인사를 한다. 자연의 마음은 낯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무한의 사랑이다.
“어때요 손형, 공기가 확실히 다르죠?”
뒤를 돌아보니 임선근 9단이 웃으며 다가선다. 최창원 6단과 김수장 9단도 어느새 일어나 아침채비에 부산하다.
“정말 좋은데요, 숨을 쉬는 느낌이 달라요.”
어찌 다르지 않을까. 오랫동안 죽은 듯 누워있던 기쁨의 세포들이 아우성치며 이토록 세차게 가슴을 두드리는데---. 오늘 이 아침은 어제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시간(그러니 살아있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 ‘살아있음’에 경배하라).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아이고, 이렇게 일찍 출발할 줄 알았으면 조금 자두는 건데---”
‘이녀석들, 지금 깨우면 투덜거리겠지?’라며 장난꾸러기처럼 웃던 임 9단이 각 방을 돌며 젊은 친구들을 깨우자 최명훈 8단이 ‘밤을 꼬박 새웠다’며 너스레를 떠는데 정작 얼굴은 ‘사실은, 하나도 피곤하지 않아!’라는 표정이다.
일행은 아란야의 주인내외가 차려준 정갈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미리 부탁해둔 두 덩이씩의 주먹밥(정상에 올라 맛볼 점심)과 사탕, 초콜릿 등 약간의 간식거리를 나누어 챙겼다. 예정된 시간보다 10분을 넘긴 오전 7시 10분 드디어 정상을 향해 출발! 아란야의 주인내외는 앞마당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준다. 장삿속에 물들지 않은 고마운 사람들.
아침햇살을 받아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거느리고 앞서 나아가던 최창원 6단이 짐짓, 뒤로 물러선다. 젊은 친구들과 함께 가면 기운이 달릴까봐서? 아니다. 최 6단은 칠순을 3년 앞둔 원로지만 요즘도 백두대간을 누비는 등반의 베테랑, 산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젊은 건각(健脚)이다. 그럼, 왜?
‘해우소(解憂所)를 다녀오겠다’며 뒤로 처진 임선근 9단이 일행의 꼬리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 때문이다. 덕주사, 덕주산성을 지나 제법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더운 김이 훅훅 오른다. 산행은 삶의 바로미터다. 평소 자기관리에 무심했던 사람들은 꼭 그만큼 고통스러워진다. ‘산을 오르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방탕한(?) 생활을 했는지 깨닫게 된다. 꼭 그만큼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니까’(임선근 9단의 지론).
머릿속 가득 뜨거운 북소리를 채우며(이런, 생활이 방탕했다는 얘기가 되나?) 30분쯤 올랐을까. 마애불 바로 아래 큰 바위 주변으로 젊은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밝은 얼굴로 잡담을 나누고 있는 이현욱 5단과 한종진 4단은 평지에서의 표정 그대로(산에 오른 거 맞아? 호흡도 고르고, 힘들다는 기색이 전혀 없잖아. 젊은 친구들이라는 걸 감안해도, 오뉴월 삽살개처럼 헐떡이며 오르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자존심이 좀 상하는군. 아직은 나도 사나이라고---^^;;). 그나마 최명훈 8단의 말이 약간의 위로를 준다.
“에고, 한 번에 정상까지 치고 올라가려고 했는데 이거, 열 번도 더 쉬게 생겼네요.”
잠시 후, 최창원 6단과 김수장 9단 그리고 체내의 우환(?)을 해결한 임선근 9단이 합류했는데 임9단은 ‘아이고, 최사범님이 빨리 쫓아가야 된다고 뛰다시피 오시는 통에 죽는 줄 알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월악산은 충북 충주시와 제천시 경계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충주호와 맞닿아 있고 남쪽 만수봉까지 긴 주능선을 형성하고 있다. ‘만수봉암릉’이라고 불리는 주능선에는 불꽃처럼 피어오른 아름다운 암봉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만수봉암릉을 중심으로 동쪽 사면과 서쪽 사면으로 나뉘는데, 동쪽 사면이 부드럽고 유순한 데 비해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한 데다 길고 짧은 암릉이 많아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송계리코스와 우리 일행이 오른 덕주사코스를 가장 많이 선택한다. 덕주사 코스는 편도 8.6km 정도로 약 3시간 30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간략하게 코스를 설명하면 덕주사 → 덕주사지 마애불(덕주사에서 약 30분) → 가파른 길 → 960.6m봉(마애불에서 약 45분) → 평탄한 능선길 → 월악산 남벽(960.6m봉에서 약 25분) → 오른쪽 길 → 영봉(1,097m 월악산 정상)이다. 주의할 점은, 마애불 위로는 식수원이 없으므로 정상에 오를 때까지 마실 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마애불 샘터에서 물통을 채워 배낭 양 옆에 장전하는데 임9단이 낭랑한 목소리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지금까지는 약과야. 여기서부터가 깔딱이라고. 다들 각오는 돼있겠지? 아마, 돌계단이 5천개는 넘을 걸?”
“진짜요? 정말인지 세어봐야겠는데---”(박승철 3단)
‘윽, 그렇지 않아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그게 별거 아니었단 얘기야?’ 이름에 ‘악(岳)’자가 들어가는 산치고 만만한 산이 없다더니 과연, 960.6m봉을 넘어 평탄한 능선길이 나오기 전까지 2시간쯤은 유격코스, 고행의 연속이었다. 자신만만하던 젊은 친구들의 이마에도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 막내 김수진 초단의 얼굴은 아예 가을사과처럼 발갛게 익어버릴 정도였다.
감탄스러운 건,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한데 어느 누구 하나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 나이는 어려도 역시 프로는 달랐다. 하긴, 연구생시절부터의 프로수업은 ‘참고 견디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수업시간 내내 바둑판 앞에 앉아서 기보를 놓아보거나 대국하는 일 자체가 일반인들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행이다.
‘좋아하는 바둑을 두는데 하루 온종일이라고 지루할까?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말씀하시지는 말라. 그건, 5분, 10분에 바둑 한 판을 뚝딱 해치우는 아마추어 초중급자의 경우에나 그런 것이다. 속기전을 제외한 프로들의 대국시간은 대부분 각 4시간(두 대국자의 제한시간을 합하면 8시간). 게다가 1분 초읽기까지 몽땅 사용하게 되면 오전 10시에 시작해서 저녁나절에나 끝나는 게 보통인데 일반인들은 곁에서 관전하는 것만 해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지루하고 괴롭다.
또 이들은 슬기롭다. 힘이 들면 힘이 드는 대로 그 환경에 최선으로 적응하는 법을 스스로 안다. 몇몇 친구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파른 돌계단에 지쳐 주저앉았다가 이내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즐겁게 오르는 방법을 찾아낸다(이현욱 5단과 송아지삼총사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정확치 않다). 일찍이 공자께서도 말씀하셨다. 知之者不如好之者요, 好之者不如樂之者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겨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말이다.
바둑이 가진 이 하나의 미덕만 해도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칠 이유가 충분하지 않겠는가. 바둑은 인내와 극기, 나아가 몰입의 즐거움을 가르치는 수단이요, 도구다(나는 ‘바둑을 두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막연하고도 셈속이 뻔한 웅변 따위는 좋아하지 않는다).
인내와 극기심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바둑과 산은 매우 잘 어울린다. 많은 프로들이 산을 즐겨 찾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임9단은 ‘프로에 입문해서 20여 년 동안 후배들에게 특별히 보여준 게 없지만 등산만큼은 꼭 권하고 싶다. 프로들의 심신단련에 등산보다 더 좋은 건 없다’며 바둑과 산의 찰떡궁합론을 편다.
월악산의 지질은 4, 5억 년 전의 퇴적암에 1억 년 전 화강암의 관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른 산에 비해 울창한 숲의 분포가 적어 한낮의 햇살을 피해 쉬어갈 그늘이 드물다. 물과 그늘이 없는 등반은 더 많은 인내와 극기심을 요구한다. 일행은 정상이 눈앞에 보이는 남벽에 이르러서도, 나선형으로 산허리를 휘감으며 올라야 하는 독특한 길 때문에 30여분을 더 그늘 없는 돌계단 오르기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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