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커뮤니티 > 一圓
一圓 해우소 解憂所

작가의 말


 이 글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저작권자와 협의하지 않은 무단전재는 금합니다.
잃어버린 술(酒)의 맛. 그 쓸쓸함에 대하여.
2022-01-25 오전 10:12 조회 507추천 12   프린트스크랩

겉장을 떼어내고 1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새로 걸어 놓은 지

벌써 한 달이 거의 다 채워져 가지만 한 해를 시작한다는

원단(元旦)에 새 맛은 피부에 닿지도 않은 채 어정쩡 지나갔다.

음력을 폐지한 조선조 끝 무렵 고종을 업고 김 홍집 등이 주도한

을미개혁이 1896년에 있었다하니, 태양력이 이 땅에 들어 온지

100년이 훨씬 넘었지만, 명절용 선물 택배는 구정(舊正)

한 주 앞에 둔 어제 오늘에서야 문을 두드려 오니

느낌은 이제가 세밑이다.

 

어쩌다 보니 세월에 떠밀려 원하지 않던 어른 소리를

자주 듣게 되면서 신년 인사를 앉아서 받는 일이 늘었다.

이젠 세배 드리러 갈 곳도 몇 자리 남지 않았다.

그 중 한 곳은 꼭 가고 싶지만 자꾸만 망설여져 작년에도

전화로만 죄송함을 전하며 가서 뵙지 못한 형님 한 분이 계신다.

李白에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처음 내게 들려주신 분이시다.

그 때 첫 머리를 이렇게 시작하셨다.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술을 마신다.

잔을 들어 밝은 달 맞으니 그림자까지 셋이 되었다. 라고.

 

연세가 九旬을 넘기셨지만 달이 없어도 그림자가 아닌

마음에 드는 사람하나만 곁에 두시면 아직 소주 한 병은

해가 눈을 녹이듯 거뜬하신 분이다.

119 구급차에 실려 간 이후 2년이 넘게 술을 입에 대지 못한다.

어떤 선물보다 소주 잔 을 부딪히는 대작을 더 반기시는 그 분께

술을 못 마시게 된 내 病歷을 밝혀 실망과 걱정을 드릴까 두려워

설을 앞두고 다시 끙끙거리고만 있다.

이제 서로가 남은 시간을 예측할 수 없는 나이인지라

혹여 다시는 그분과 나누던 흥취를 누리지 못할까 가슴이 아리다.


인연과의 만남은 정해 진 길도 없이 불쑥 곁으로 오는 것 같다.

안채를 뼈대만 남기고 모두 털어내고 개축하는 석 달 계약에

공사를 위해 그 분 댁에 간 늦은 봄에 큰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공사를 시작하고 한 달이 넘도록 안주인에게만 맡겨놓고

임시로 쓰던 바깥채에 있다는 주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공사비 수급에 지장이 없으니 굳이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뒤통수에 매달린 궁금증은 시선을 늘 바깥채에 두게 했었다.

 

이르게 찾아온 장마 비로 일을 멈추고 그 분을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때는 두 달 정도에 공정을 앞두고서였다.

첫 인사를 드리러 갔었던 창고 형태로 쓰던 아래채 방은

어수선하고 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둡고 침침했다.

그 어두운 배경을 뚫고 와락 달려들어 우렁찬 인사와 함께

악수를 청하는 주인을 보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100kg는 훨씬 넘을 것 같은 거구의 사내는

팬티와 런닝셔츠 한 장씩만을 달랑 걸친 벌거숭이 모습이었다.

 

기괴한 차림에 주인과 별로 민망해 하지도 않는 부인이 주는

불쾌감에 돌아서려다 남은 공사비에 묶여 내민 손을 억지로 잡았다.

솥뚜껑 같은 손과 덥석부리 수염에 그는 영락없는 삼국지 속에서

막 튀어나온 장비였다.

벌거벗은 주인과 차 한 잔을 나누다 나는 찻물을 뿜을 뻔했다.

원고마감에 쫒겨 볼 수 없었다던 주인에 직업이 작가라며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남편을 바라보며 부인이 보여주던

자랑스러운 어이없는 표정과 눈빛은 그런대로 참아 냈지만,

 

팬티 바람에도 너무도 의연하고 품위 있게 차를 마시는

작가 선생에 터무니없는 기묘한 비대칭 모습에 나는 마음의

평행을 잃고 입술을 깨 물다 끝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작가는 무슨 작가.

남의나라 사람이 쓴 글 적당히 풀어서 팔아먹고 살았는데.

옆집 사람 얘기하듯 흘렸지만 후에 알고 보니 나도 읽었을 만큼

꽤 많은 양의 책을 출간했던 유명 번역 작가셨다.

 

그냥 나가려다가 크게 웃었으니 술이나 한 잔 하고 가시게.

감추지 못하고 노출시킨 불쾌감과 어이없어하던 내 웃음을

솔직담백한 천진함으로 귀엽게 보셨다며 술을 내 오게 하시곤

마시던 찻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 건네 주셨다.

酒仙 과의 만남은 그렇게 두 번에 놀라움으로 시작했다.

처음 그 분과 대작을 했던 날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 기억이 없다.

조 지훈 선생에 주도유단(酒道有段)으로 치면 주도 삼매(三昧)

가끔 들기도 하니 酒仙으로 단 정도에 장주(長酒)는 되겠지.

정신을 놓기 전에 가물가물 듣던 말씀이 남았을 뿐이다.

 

지고는 못 가도 마시고는 간다던 술에 대한 내 자존심은

그날 땅바닥에 완전히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그 후로 몇 번에 자리를 같이하며 그분이 酒仙임을 통감했고

그 분과 맞 대작을 하는 날은 필름이 끊기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몸통 자체가 왕창 부서지는 날이 되곤 했었다.

남은 공사대금이 입금 되어 마지막 인사차 들렸던 날이다.

성실히 맞 대작을 해드려 크게 흥이 나셨던 지

月下獨酌을 노래하시고는 느닷없이 동생을 삼자 하셨다.

 

꽃과 그림자 보다는 벗이 되어 마주 앉은 자네와 나.

그리고 또 하나의 평생 친구가 되어 주는 맑은 소주병을

이렇게 넉넉히 옆에 두고 셋이 되어 마시니 李白 보다는

내가 더 주중선(酒中仙)에 가까워 보이지 않는가 하셨다.

月下獨酌을 한 구절 읇으시고 지그시 감은 눈으로 한 잔.

뜻풀이 한번 해주시고 또 한 잔을 건네주시며

내 동생 하시게 나. 하시고 주셨던 그 술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향기를 잃지 않고 맛나게 내 마음에 남아있다.

 

내 큰 형님보다 거의 10년이 많으시고 나와에 연차는 거의

20년이 넘는 어른이시니 처음처럼 선생님으로 호칭하게

간곡히 부탁을 드렸더니 너무도 간결하게 정리를 해주셨다.

더 큰 형이라 부르시게.

1972년 유신헌법이 공포 된 이후로 세상과 단절하고 사시던 분이

어찌 사람을 다시 마음에 품었는지 의아해 하시던 형수님이

두 사람 전생에 인연이 형제였나 하셨는데 정말 그런지도 모른다.

맑고 고귀한 품성을 지닌 酒仙과의 만남은 내게 행운이었다.

내 생애를 더 푸르고 빛나게 해주셨던 그날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이글을 쓰며 들리는 것 같은 더 큰 형님에 그 호탕한 웃음소리와

동 서양을 넘나들며 쏟아내시던 아름다운 詩語들과

소주의 맑은 향이 오늘따라 너무도 듣고 마시고 싶다.

사발로 마시던 퇴주 정종을 소주잔에 가득도 못 채우고

반잔에도 감사해야하는 설이 코 앞에 다가왔다.

酒仙 곁으로 갈 수도 없는 酒卒은 인생의 으뜸은 만취(滿醉)라던

저승에 있는 영국시인 바이런에게 화살만 날리고 있다.

구름을 타고 천계를 누비던 신선이 하계에 버려진들 이보다 더 슬프랴.

 

그리운 내 마음이 더 큰 형님께

병 없이 하늘이 내려주는 100세 나이

상수(上壽)로 가는 다리가 되기를 바라며

술 없는 세밑에 하루를 또 한 번 속절없이 보내고 있다.  

┃꼬릿글 쓰기
지니그니 |  2022-01-25 오전 11:43:11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술을 시적으로 마십니다.  
一圓 마음으로 마시는 술이 있었으면 합니다만...
짜베 |  2022-01-25 오후 12:36:5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아주 큰 행복임을 일원님의 글을 보며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빨리 쾌차하셔서 한 두잔 부터 차차 드시게 되기를 빌겠습니다.  
一圓 아직은 꿈같은 일이지만 그래 봤으면 참 좋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짜베님과 꼭 한 번 마시고 싶습니다.
⊙신인 |  2022-01-25 오후 11:20:5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글 참 맛있게 쓰시네요!
술을 못마시는 제가 글에 취할듯 합니다.
멋진 분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얻으셨네요.
부러우리만치 축하드립니다^^  
一圓 술로 만난 인연은 연기처럼 사라지기도 한다지만,
사람과 사람끼리 좋아질 때 술이 더 해지면
풍요로움을 느끼게도 하니 그래서 쓸쓸함이 생겼나 봅니다.
삼나무길 |  2022-01-26 오전 12:18:3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  
一圓
다녀가 주셔서 고맙습니다.
킹포석짱 |  2022-01-26 오후 12:01:1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진묵대사님이 생각 나네요^^,  
一圓

생김이 때론 수호지에 노지심 같기도 하신데 신통 공부를 하시고
승복을 입으셨으면 그러셨을지도 모릅니다.
팔공선달 |  2022-01-27 오전 7:51:2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우리의 10여 년의 술 약속은 이승에서 이루어 지지 않을 듯 하니
저승 어느 간이역에서 우연히 만나 빛바랜 나무 벤치에서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심술궂은 열차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우리보다 더 놀랬을 코스모스가 머금은 석양을 말없이 바라보며
누구랄 것도 없이 빈잔에 술 을 따뤄주고 같은곳을 바라봅시다
아마 저승에는 말을 못한다는 속설이 있더이다.  
一圓 |  2022-01-27 오후 4:56:16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못 만난 분들과 마실 수 있을 때 만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갈수록 더 커집니다.
혹시 法印님을 높은 그 곳에서 만나게 되면 말은 서로 나누지 못해도
코스모스가 크게 놀라도록 세수 대야만한 큰 잔에다 소주 한 20병정도 부어서
흠뻑 취하도록 마시고 싶습니다.

 
팔공선달 만나서 실망할 수도 있고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술은 매개고 만남이란 사이버에서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덜렁덜렁 실수하며 사는 게 좋은 사람인데 그건 내 생각이고
가끔 치열한 사람들과 만나면 서로 실망합니다.
나를 나 이상으로 보니 그 사람이 실망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줬는데
실망하는 모습을 보니 나 또한 실망스럽고.
양해가 되지 않으면 술만 욕되게 하더군요.
같이 마셔 흥겨운 게 아니라 마시고 싶어 만났다 술 탓만 하게 되니. ^^
주향 |  2022-01-29 오전 8:19:3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그 좋은 술을 많이 낭비 했드랬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러는 중 이고요
술 하나로 엮어 가시는 물 흐르듯한 글 내용에 그저 감탄할 뿐 입니다
작가님의 글 항상 맘으로 읽고 있습니다
좋은글 감사 합니다  
一圓 제 아내에 말로는 두 사람 몫은 충분히 마셨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제가 타고 난 술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던 가 봅니다.
함께 마음으로 느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산사람 |  2022-02-15 오전 1:38:49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글 잘보고 갑니다 한잔 해야 겟네요 부럽고 아쉽고 쓸쓸함이 교차하네요 나이들어 쓸쓸하지 말아야 할진데 쓸쓸함이 전해오네요  












* 띄어쓰기 포함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000 / 400바이트)
대국실입장하기
다운로드 이용안내 고객센터
정회원가입
오로볼구매
가장 많이 본 기사
스폰서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