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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備忘의 기록記錄 - 4
2021-04-21 오후 12:55 조회 1177추천 6   프린트스크랩

비망備忘의 기록記錄 - 4

 



십 여 년 전,
출국하는 둘째를 배웅하러 간 인천공항 2층의 곰탕집 앞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만남이었지만 서로 반가운 얼굴로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안식구의 안부도 묻고 동창들의 근황도 이야기하는데
친구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하며 뒷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친구는 말하지 않았고 나는 듣지 않았지만
친구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고 나는 친구의 표정을 읽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배신감을 말하고 있었고 나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만나기 한 달 쯤 전의 선거에서 친구는 낙선하였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선거사무실에 얼굴 한 번 비치지 않고
친구가 국회의원 하던 내내 매년 보내주던 정치후원금조차
하필이면 선거가 있는 그해에는 보내주지 않은 나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그 친구는 표정으로 말했고 나는 그것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숨길 수도 없게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졌고
서둘러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더는 볼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 이상 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헤어진 우리는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중학교의 2학년과 고등학교의 1학년 때는 같은 반이기도 했던 동기 동창이었고
과는 다르지만 같은 대학을 졸업하여 제법 친하던,
나만의 착각이었겠지만, 친구였습니다.

내가 입학한 중학교는 한 학년이 일곱 학급 420명인 학교였습니다.
420명의 학생 중 집에 자가용이 있는 학생은 세 명이었고
기사가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고 등하교를 하는 학생은 그 친구가 유일했습니다.
크게 운수업을 하던 친구의 아버지는
당시 제주도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였습니다.

좋은 친구였습니다.
부자인데다 공부도 잘하고 큰 키에 얼굴까지 귀티 흐르는,
거기에다 공부 못하고 키 작고 가난한 친구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리는 좋은 친구였습니다.

같은 반이었던 중학교의 2학년 때
바둑을 좋아하던 우리는
공책에 바둑판 그려 점심시간마다 바둑을 두었고
( 과 흑×으로 바둑을 두고 따 낸 돌은 지우개로 지우며 공책 옆에 바를 정()자로 써가는 바둑, 두어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그 공책이 몇 권이 될 정도였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잠시 직장생활을 하던 친구는
몇 년 만에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더니
부친의 사업을 물려받아 버스회사를 운영하면서 차츰 사업의 영역을 넓히더니
사십대의 중반부터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부친이 워낙 탄탄하게 다져놓은 인맥에다
훤한 얼굴에 뛰어난 언변과 친화력,
무엇보다 괸당의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성씨를 갖고 있었습니다.

처음 도전에서 당당히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두 번째도 연달아 당선되었습니다.
동기동창들은 누구나 자기 일처럼 친구의 선거를 도왔고 선거자금을 후원하였습니다.
어떤 친구는 삼십 만원을 후원하고
어떤 친구는 오십 만원을 후원하고
많이 친한 친구들은 백 만원이 넘는 정치후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의 경우는 정치후원금의 액수에 따라 대응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에게 매년 연하장을 보내는 것은 동일한데
후원 액수에 따라 30만원까지는 비서진이 감사의 전화를 하고
오 십 만원이 넘어가면 본인이 직접 전화를 했습니다.


친구가 삼선에 도전하던 그 해, 사업이 힘들었습니다.
은행과의 거래에서 담당자의 말만 듣고 생각 없이 찍은 도장이 내 발등을 찍었고
어처구니없는, 거의 사기 수준인 그 계약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나의 몫이었습니다.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지 않고 도장 찍어버린 나의 실수를 지켜주는 법은 없었고
당연히 친구의 선거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친구는 그런 나를 원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도와주어야 할 네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와의 인천공항 그 만남 후로
 나는 정치하는 친구들과의 모든 교류를 끊었습니다
.

┃꼬릿글 쓰기
⊙신인 |  2021-04-22 오후 11:35:15  [동감1]  이 의견에 한마디
제주도가 가지고 있는 괸당문화......
처음 접했을때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에 정치까지 얹으면!

아프지 않은 삶은 이 세상에 없어보입니다!ㅜㅜ  
영포인트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앉으시면 말하시곤 하셨지요.
내 살아온 이야기 책으로 쓰면
일곱권의 책으로도 다 쓰지 못한다고.....

[비망備忘의 기록記錄]이라는 글제로 정리해 보려하니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많네요.
손주에게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살아왔던 이야기라는 느낌으로
두서없이 정리해 가는 중입니다. ~ ♡ ~
소판돈이다 |  2021-04-25 오전 8:10:43  [동감1]  이 의견에 한마디
배타적 끼리끼리 풍토가 있었군요? 그 것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가 아니고 4.3이후라면 우리
들 스스로 참회해야 할 고해와 고백의 시간이 필요하군요.
잘 읽었습니다. 영님  
영포인트 네...
조금은 부끄러웠던 기억입니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내 편 인가로 접근했었던
그 문화는 당연히 청산 되어져야 할 문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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