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회의 모임에 초청장을 받은 것은 엊그제였다.
엽서로 날아든 메모에는 ‘귀하를 특별히 초청합니다. 오셔서 소주 한잔 하면서 친교의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부담갖지 마시고 편한 마음으로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회장 길성국 올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참고 표시를 하여 ‘부인을 동반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라고 되어 있었다.
모임 일시는 2009년 7월 5일 저녁 7시 ○○식당이었다. 아직 며칠간의 여유는 있었지만 참석할 것인가 말 것인가 생각을 하였다.
사실은 며칠전 무자회의 총무로 있는 친구 배정철한테서 이번 모임에는 특별 케이스로 몇사람만 입회시키기로 하였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있었
다.
무자회가 어떤 성격의 모임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모임의 종류가 워낙 많고 다양하다 보니 이름이야 적당히 갖다 붙이면 될 것이지만 그래도 무자회가 어떤 모임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에게 전화로 어떤 모임인지 물었지만 별다른 얘기도 해주지 않고 그냥 나와 보면 안다고 하여 궁금증은 더해 갔다. 어쩌면 녀석들이 날 골탕 먹이기
위해서 무슨 작전을 짜는 것은 아닐까.
나는 나름대로 무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1. 무자회는 생선회 종류는 아니다.
2. 무자(戊子)는 육십간지중 25번째 해당한다.
3. 무자(無子)는 무자식,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것.
4. 무자(巫子)는 신령을 섬겨 길흉을 점치고 굿을 주관하는 사람. 무당을 말한다.
5. 무자(撫字)는 무육(撫育), 즉 어루만지듯이 잘 돌보아 기르는 것.
6. 그 외 사람의 이름이나 기타 고유명사를 일컫는 것
위의 내용중 신빙성이 없는 것부터 검토를 해 보았다.
생선회를 뜻하는 무자회는 당연히 아닐 것이었다. 무자회(戊子會)는 무자년에 태어난 동갑끼리의 모임일 수 있는데, 친구는 동갑이 아닌 사람도 있다고
했으므로 이것은 아니었다.
계원들 중 자식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으므로 무자회(無子會)도 아닐 것이다. 혹 아들이 없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닐까. 아니 딸도 자식이므로 그것도 아닐 것이었다.
무자회(巫子會)는 무당들의 모임인데 그들이 모여서 굿판을 벌이자는 것일까. 그들이 신들린 사람도 아니고 하물며 식당에서 굿판을 벌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무자회(撫字會)는 어루만져 잘 돌본다는 뜻인데 무얼 어루만지며 잘 돌본다는 것인지. 부인을 동반하면 더욱 좋다고 했으니 집사람을 데리고 가서 식당에서 잘 어루만져 돌본다는 것일까. 집에서도 잘 어루만지지 못하는데 남들이 다
보는 식당에서 어루만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 밖에 무자회로 이름 붙일만한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자꾸만 미로를 헤매이는 것 같았다.
모임 당일. 아내와 함께 나는 ○○식당으로 향했다.
아내는 그날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었으나 나와 같이 가기로 하였다. 여태까지 자기를 동반한 모임이 없어서인지 못이기는 척 하면서 따라나선 것이었다. 내심 반가운 모양이었다.
식당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런데 전부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K회사에 같이 다녔던 사람들이었는데 모두 부부동반으로 온 모양이었다. 배정철이 반갑게 맞으며 악수를 청했다. 여자들은 한쪽으로 앉아 있어 아내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가 앉았다.
회장의 인사가 있었다.
- 반갑습니다. 두달동안 못봤는데 잘 지내셨습니까? 우리 무자회가 결성된지도 벌써 일년이 다 되어 갑니다만 그동안 별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보낸 것 같습니다. 회원수는 변동이 없었습니다만, 이번에 특별히 두사람을 입회시키기로
하였습니다. 회원분들에게 제가 사전에 연락을 드렸습니다만 미처 연락을 못받
으신 분도 있고 해서 말씀드립니다. 오늘 새로 오신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얼떨결에 나와 S씨가 소개되었다. 부인들도 같이 덩달아 인사를 하였다. 이어서 총무인 배정철이 말하였다.
- 그럼 오늘의 이벤트를 곧 시작하겠습니다. 소주 한잔씩 드시면서 편안한 맘으로 지켜봐 주세요. 우리 무자회가 그동안 돈독한 친목을 유지해 왔습니다만, 앞으로도 계속 이런 분위기를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총무의 말이 끝나자, 미리 준비된 탁자와 물건들이 식당 방 입구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탁자 위에는 길쭉하게 솟은 검은 보자기가 덮씌워져 있었다.
그 앞에 옛 화랑도를 연상시키는 복장을 한 여자가 번쩍이는 장검을 들고 나타났다. 가볍게 목례를 한 후 검은 보자기를 열어제쳤다. 탁자 위에는 막대처럼 길고 큰 무가 세워져있었다. 여자는 자세를 낮추며 호흡을 가다듬더니 손에 든 장검을 휘둘렀다. 칼끝에서 바람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칼날이 공기를 가르자 순식간에 무가 내려앉았다. 바람을 스치듯 칼끝이 살아 움직이며 무를 꽃잎처럼 포개어 내렸다. 눈깜짝할 사이였다. 너무나 한순간에 일어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배정철은 그 와중에도 캠코더로 연출되는 장면을 연신 찍어대고 있었다.
다음은 도마와 또다른 무가 준비되었다.
이번에는 다른 여자가 나타났다.
한복을 입은 사십대 중년으로 보이는 두 번째 여자는 소매를 걷어 부치고 무를 썰기 시작했다. 하얀 무가 여자의 손에서 총알맞은 것처럼 맥없이 쓰러져갔
다. 처음엔 둥근 모양으로 썰고, 다음은 네모각, 세모각 자유자재로 썰었다. 보이지않을 정도의 빠른 손놀림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크기와 두께가 한결같은 것이었다. 구경을 하는 부인들도 감탄하며 놀라워하였다. TV에서 달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자는 말하였다.
- 제가 처음부터 이렇게 무를 잘 자른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혼잣몸으로 애들을 키우느라 식당을 전전하면서 일하다가 익힌 것입니다. 저는 다른 식재료보다 무를 가장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무는 하얗고 두루뭉실해서입니다. 또 도와주는 사람없이 홑지고 외로운 저의 처지와 비슷해서입니다.
그러나 무는 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훌륭한 채소입니다. 무를 많이 먹으면 속병이 없어집니다. 천연소화제 역할도 합니다. 좋은 무를 고르는 방법은 둥글고 균일한 모양이 좋고 잔뿌리가 많고 거친 것은 좋지 않습니다. 두들겼을 때 퐁퐁 소리가 나면 바람이 든 것이며 매운 맛이 적고 단맛이 있는 것을 고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더욱 좋은 것은 남편들이 집에서 무를 썰어 요리를 하여 부인에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무를 써는 정숙한 마음으로 부인을 대하고 가족을 위한다면
가정의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여기 오신 남편들께서는 부인들을 많이 많이
도와주세요…
무 썰기 시범이 끝난 후, 남자들의 무 썰기 연습이 있었다. 남자들은 두서없이 무를 썰고 자르며 부인들과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무자회 이름의 비밀을 안 것은 큰 수확이었다.
무를 썰고 자르는 것은 여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세상의 남자들, 남편들이여. 무같이 하얗고 정갈한 마음으로 오늘 저녁부터 부엌을 방문하자.
무자회의 다음 이벤트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