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自殺)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을 말한다.
바둑 용어의 자충(自充)은 자기가 놓은 돌로 자기의 수를 줄이는 것으로 스스로 한 행동이 자기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바둑에서의 자충을 자살과 비유할 수는 있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확연히 다른 것이다.
신성한 바둑에서 자살이라는 끔찍한 일은 아예 허용되어 있지 않다.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목숨의 끝. 살아있는 숨의 마지막 힘이 끊어지는 지점. 삶의 마지막 지점. 야구에서 투수의 꽉찬 볼이 들어가 타자를 꼼짝 못하게 하는 곳. 사람은 그곳에 수시로 발을 딛는다.
그러나 바둑에서는 그곳에 발을 디딜수가 없다. 없도록 되어 있다. 스스로 목을 매는 일이 없다. 자신의 온몸을 사르는 분신같은 것이 없다. 음독을 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포위된 마지막 남은 한수에 돌을 놓을 수 없다. 그 곳에 돌을
놓는다면 그것은 이미 바둑이 아니라 다른 종목일 것이다. 바둑의 규칙에는 없는 것이므로 바둑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자살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죽음의 저쪽으로 가버리기 때문에 답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도피성으로 자살을 택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또다른 해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천원-하늘의 태양을 기점으로 우주를 관장하는 신성한 바둑에는 자살이라는 불길한 기운은 어디에도 찾을수가 없다.
따라서 바둑둘줄 아는 사람 중에는 자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있다 하더라도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은 통계적으로도 확인한 것이다.
내가 면사무소 호적사무담당 하던 시절.
각종 호적신고시에 신고서류에 인적사항을 적는 항목이 있었다. 그 중에 사망신고가 있는데 내가 관할하던 곳은 호적인구가 많아 사망신고 건수가 상당히 많았다. 호적인구가 10만명이 훨씬 넘었으니까.
K시의 전체 인구가 10만이 조금 넘는데 1개면의 호적인구가 10만이 넘는다면 업무량이 제법 많은 편이었다. 호적인구란 주민등록상 인구와는 달리 본적을 둔 호적상 인구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본적 개념이 없어졌지만 그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다.
당시 나는 호적신고에 나타난 각종 통계를 뽑아 군청에 보고하였는데, 사망신고서 기타란에 사망자의 생전 취미활동란을 추가하여 자체적으로 조사해보
았다.
사망자의 취미는 등산, 낚시, 운동, 우표모으기, 여행, 퍼즐, 독서, 영화감상, 음악감상, 장난감모으기, 서예, 수석, 조각, 고물수집 등등 가지각색이었다. 그러나 바둑을 취미로 쓴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통계수치에 바둑란을 아예 없애버리고 말았다.
요즘은 각종 통계를 근거로 국가예산을 짠다고 한다.
최근 들어 연예인 등 공인의 자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자살, 실연으로 인한 자살, 기타 사유로 자살자가 급증하고 있는 시점에 정부에서는 자살방지 대책까지 세운다고 한다.
이 기회에 바둑을 널리 보급하여 자살을 예방하는 효과를 거두면 어떨까.
권력의 실세에 있는 사람이 힘을 발휘하여 예산을 반영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좋을 것이다.
유아원에서부터 바둑과목을 정규화하여 아이들에게 가르치면 두뇌개발, 건전한 심성발달로 교육의 질도 한층 높아질 것이다.
바둑을 배우면 바둑 자체에 자살이라는 용어가 없으니까, 성장하면서 자살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것이고 보다 더 넓은 안목으로 인생을 관조할 것이다.
우리집 가훈은 ‘인생은 어떤 경우에도 버텨볼만한 가치가 있다’로 되어 있다.
액자로 만들어 방에 걸어놓고 매일 수시로 눈길을 준다. 아이들도 그렇게 봐오며 자랐다. 별탈없이 잘 컸다. 옆길로 빠지지 않고 대체로 무난하게 성장해 왔
다. 별다른 사고도 치지 않았다. 자신의 앞길은 스스로 진지하게 모색하며 나아갈 것이다.
한시적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코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살만은 안된다.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야한다. 삶의 운전대를 조금만 틀면 새로운 인생이 열린다. 한 순간의 부주의로
물속에 빠져 죽을 수는 없다.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여. 바둑을 배워라.
바둑에는 자살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