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간의 오만함을 신이 허물어뜨린 탑이다.
노아의 홍수 뒤에 인간은 신을 의심하고 도전하는 의미로 새로 정착한 바빌로니아에서 하늘에 닿을 탑을 쌓기 시작하는 데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신(야훼, 하느님)이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언어를 혼동시켜 흩어지게 하여 중단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눈을 의심할만한 사건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바둑판 위에서 바둑알을 쌓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수천, 수만판의 바둑을 두어 왔지만 바둑알을 쌓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바둑알을 튕기는 알까기 정도는 해봤을 뿐.
옛날에 한번 호기심으로 바둑알을 몇개 포개어 본 적은 있었지만 바둑알로 탑을 쌓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대여섯개까지는 가능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누군가 바둑알을 쌓고 있었다. 주변의 상황은 불분명하였다. 아니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바둑알을 쌓는다는 그 자체만으로 흥미로웠고 거기에만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다. 어쩌면 저것이 텔레비전 프로에서 방
영하는 깜짝쇼 같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누가 출연하고 싶다고 신청을 하였을 것이고 방송국에서 당연히 초청하였을 것이다.
한데 바둑알을 쌓는 사람은 가면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알려져서는 곤란하다는 것인가. 신비로움을 더하기 위한 것일까. 얼굴은 가려졌지만 복장으로 보
아서는 남자였다. 사내는 보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시키겠다는 듯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불러 자신의 손과 돌을 만져보게 했다. 한사람만이 아니라 몇사람의 불특정인을 더 불러 접착제같은 것이 전혀 없음을 확인시켰다.
사내는 바둑판 앞에서 잠시 경건한 자세로 눈을 감더니 곧바로 바둑알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바둑판 중간에 여러개의 바둑알을 네모 모양으로 기초를 한 뒤 그 위로 한층씩 쌓아갔다. 마치 벽돌을 한장 한장 쌓아 올리듯 그는 신중하게 바둑알을 놓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바둑알이 한층씩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마술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저건 분명 마술일 것이다. 마술이 아니면 저렇게 할 수가 없다. 아니 마술이라고 해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이런 마술은 있을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 마술이 있다면 나는 그를 나의 신으로 섬기리라. 아니 바로 지금 내 눈앞의 저 사내가 나의 신이다. 그는 바둑의 신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바둑의 신이다. 입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프로 9단인들 한층이라도 쌓을
것인가. 그들은 바둑의 승패와 관련된 수순에만 입신의 경지에 이른 것이지 바
둑 자체의 건축술에 관해서는 모를 것이었다.
사내는 이윽고 바둑알을 다 쌓았다. 층수로 따지면 15층이었다. 흑백의 바둑알이 돌탑처럼 정교하게 탑을 이루고 있었다. 카메라 섬광이 번쩍이며 이 광경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사내의 이마에 땀이 송송 배어나오고 있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시야에 또다른 탑이 어른거렸다. 그것은 마을 뒷산에 있는 돌탑이었다. 그 돌탑은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올려 놓은 것이 쌓여 사람의 키높이를 넘고 있었는데 그 탑이 갑자기 넘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돌탑이 내 눈앞에서 곧장 쓰러질 것 같아 나는 두손으로 그것을 막으려고 급하게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러나 돌탑은 그냥 그대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와 함께 바둑탑이 우르르 내려앉았다. 사내는 놀란 듯이 흠칫 뒤로 물러났다. 나의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죄를 지은 사람처럼 사내 앞에 꿇어앉았다. 사내가 가면을 벗고 내게로 다가왔다. 그 순간 사내의 얼굴이 산신령으로 변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꿈이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평소처럼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산 정상에 있는 돌탑이 무너져있었다. 수십년간 등산객의 정성으로 쌓여진 돌탑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있었다. 간밤엔 비바람도 없었는데 어느 몰상식한 녀석이 고의적으로 무너뜨린 것이 틀림없었다. 꿈속의 바둑탑과 산의 돌탑,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산신령이 내게 점지
해 준 것은 아닐까. 인간의 무지몽매함이 또다른 과오를 부르는 것은 아닐까.
나는 흐트러진 돌탑을 추스르고 산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