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화국 시절.
K군청에서 직원바둑대회가 열렸다. 때는 초가을로 접어드는 9월 중순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장소는 군청 인근의 S중학교 강당이었다. 대회 실무 담당자인 이상철은 바쁜 업무를 잠시 제쳐두고 며칠전부터 대회 준비를 위해 여념이 없었다.
이상철의 바둑 실력은 7급정도였으나, 바둑에 대한 애착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는 농업직으로 농산과에서 주로 농사업무를 담당하였다. 원래 농사업무가 그렇듯이 업무량이 많아 정시에 퇴근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 와중에 총무과에서 도청 바둑대회에 출전할 선수를 구한다는 얘기를 듣고, 군청의 명예도 있고 해서 무턱대고 선수를 구할 수도 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직원바둑대회를 개최하면 직원 사기진작도 될 겸 자연스럽게 선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을 했었는데 그게 오늘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대회 개최 안내문을 홍보한 결과 뜻밖에도 삼십여명이 넘는 직원이 신청을 하여 이상철은 내심 매우 흡족하였다. 사실 이번 대회는 총무과에서 정식으로 개최했다기보다는 비공식적으로 의뢰한 것이었는데, 이상철이 모든 것을 맡아 추진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취미생활 활성화로 머리도 식히고 업무 재충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요즘은 평일에 체육대회를 개최하는 곳도 있다고 하지만, 5공 시절에는 엄두도 못내었다. 요즘도 민원이 제기되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데 당시에는 평일 개최는 꿈도 못꾸었다. 그래서 합당한 시간대로 정한 것이 토요일 오후였다.
토요일 오후는 근무시간 이후였고, 장소도 군청 밖이어서 심적으로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회에 임할 수 있었는지 신청자 거의 대부분이 참여하였다. 대회는 자신이 신청한 급수별로 치수를 조정하고, 1차전은 조별 1위를 뽑고, 그 다음은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S중학교에서도 관심있는 교사 몇분이 참관하여 강당안은 바둑돌 소리와 수담이 오가는 그야말로 작은 바둑축제였다.
그런데 대회가 한참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강당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웅성거림 속에서 난데없는 고성이 들려왔다.
- 야, 너거들! 여기서 뭣하는 기야?
고함을 치면서 나타난 사람은 문순조 부군수였다. 처음엔 모두들 바둑에 몰입해 있어서 모르고 있다가 <너거들>이라는 기분나쁜 소리에 눈길을 돌렸다.
부군수는 구둣발로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매서운 눈초리를 번득였다. 금테안경 속의 실눈이 뱀눈처럼 보였다. A농산과장과 H산림과장이 경호원처럼 옆에 서있었다. 그들은 문순조 부군수를 출장때마다 수행하는 최측근들이었다.
- 자알들 놀고있네. 너거들 지금이 어느 땐데 신선노름하고 자빠졌노. 여기 농사업무 담당자 있제? 어떤 놈이고?
이상철은 진행표를 만지다 말고, 부군수 앞으로 나아가 부동자세를 취했다.
- 예, 제가 깁니다.
- 니가 농사업무 보나?
- 예.
- 예에? 이노무 새끼 대답한번 잘하는구나. 이새끼야, 니 정신이 있나 없나? 내일 모레 장관이 온다 카는데. 여기서 무슨 지랄하고 있노? 장관이 국도 3호선으로 지나갈낀데, 벼베기는 지금 우예 되있노 말이다 이새끼야!
다짜고짜 내뱉는 욕설에 참석자들은 당혹스러워하였다. 학교 선생들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욕쟁이 부군수의 내력을 알고 있는 일부 직원들은 태연한 척 하였다. 군청에 근무하는 이상철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 아, 예 어제부터 각 읍면동에 긴급 공문을 발송해서 독려하고 있습니다.
- 독려 공문만 내면 다가? 벼를 직접 비제끼야 될꺼 아이가. 여기서 이런 지랄하민서 벼베기가 되나? 이새끼야!
- 근데 아직 벼가 새파란기 많아서예. 베기가 아직···
- 뭐? 벼가 새파랗다고?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아가리를 확 잡아 째뿔라. 벼가 새파라마 비놓으마 저절로 누렇게 익게 안되있나. 그것도 모르나? 이새끼야! 이 판국에 바둑이 다 뭐꼬? 바둑이. 바둑이 밥먹이 주나?
순간, 문순조 부군수는 자기 앞에 놓인 바둑판을 홱 팽개쳤다. 연속적으로 몇개의 바둑판이 공격을 받았다. 바둑돌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우박같은 소리. 자동발사기의 총포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강당안의 천장이 우르르 진동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움칫 놀라 물러섰다.
부군수는 강당안을 한바탕 들쑤셔 놓고 휭 나가버렸다.
부군수가 사라진 뒤, 강당안의 사람들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사나운 늑대가 물어뜯다 만 먹이처럼 황량한 모습이었다.
이상철의 얼굴은 참담하다 못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상철이 욕을 얻어 먹은 것은 참을 수가 있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모멸감을 당한 것도 참을 수 있었다. 또한 소속과 상관인 A농산과장이 변호성 말한마디 해주지 않은 섭섭함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둑판을 팽개친 부군수의 행동이었다. 수십년동안 애착을 가져왔던, 마음의 신성한 휴식처 같았던 바둑을 모욕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분노에 앞서 바닥에 흩어진 바둑돌 앞에서 복받쳐오르는 슬픔을 누를 길이 없었다.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일순 정신적인 공황이 엄습했다.
아, 바둑이여! 바둑판이여! 바둑돌이여! 말단 졸병의 신세가 너를 지켜주지 못하였구나. 너의 그 검고도 하얀 얼굴에 개돼지만도 못한 상사가 똥칠을 하였구나. 바둑이여. 미안하다. 미안하다···
어느덧 이상철의 눈에서 눈물인지 모를 맑은 물기가 번져나왔다. 눈물은 그의 시야를 가렸다. 눈속을 채운 눈물이 넘쳐 방울이 되어 뚝뚝 떨어졌다. 눈알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눈물 사이로 비친 바둑알도 글썽이는 것 같았다. 매끄럽고 무심하게만 보였던 바둑돌에서 눈물자국이 보였다. 눈물자국은 강당 바닥에 비친 조명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러나 이상철은 눈물을 닦지 않았다. 아니 닦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 바둑은 결코 눈물을 닦지 않는다. 다만, 흐르는 물처럼 그냥 그저 흘러내릴 뿐이었다. 하염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