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위해 고해소에 들어가는 경우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성직자라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고해할 일이 생겨 동료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 얼마전 마음의 죄를 짓는 일이 발생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신부에게 있어 가장 중대한 죄일 수도 있었다.
성직자인 신부는 절대자(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제일 중요하다. 그 믿음의 전제하에 모든 성직이 수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의 근간을 흔들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라기 보다는 한 개인의 주장이었는데 최근에 보도된 영국의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의 말이었다.
그는 천국이나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동화일 뿐이다, 죽기 직전 뇌가 깜박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뇌는 부속품이 고장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에 해당한다 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전에도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우주의 시작과 존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말은 종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우주의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란의 재현을 보는 듯 하다.
그의 이론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그의 말은 나의 믿음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바다 저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수십년간 조용하게 지내던 나의 심중을 흔들었다. 그런 강한 자극에도 동요하지 않도록 단단하게 다져온 성직생활이었다고 자부하지만 마음 한쪽 어딘가에 작은 바람 구멍이 난 느낌이었다. 강력한 지진의 여파처럼 그것은 나를 흔들리게 하였다.
인간에게 죽음의 문제만큼 화두가 되는 것은 없다. 죽음을 뛰어 넘는, 죽음 뒤의 새로운 세계가 없다면 성직이라는 것도 한낱 허울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내가 성직을 택한 것은 어릴때의 집안 환경이 너무 가난한 탓이었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 성직자의 길을 가면 먹을 것은 걱정없다는 말에 선뜻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 과정은 만만치 않았지만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 절대자의 존재와 인간의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까지 접하게 되었고 그 해결의 열쇠는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확신이, 수십년간 고수해 왔던 믿음의 성곽에 금이 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 왔던 탑은 한낱 허상에 불과했던 것인가. 현실의 반대편, 보이지 않는 사후세계와 천국이란 벽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가. 정말 인간을 현혹하기 위해 만든 동화일 따름인가.
교회는 일시적인 환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탐닉하여 오늘날의 거대한 종교로 발전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마치 조그만 자영업을 하던 사람이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오늘날의 교회의 발전상을 보면 물질적인 풍요를 이루고 있는 것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2천년전의 약속은 아직도 소식이 없고 오직 하늘의 뜻에만 달려 있다고 하면서 믿음만을 강조하고 있다. 아직도 그것은 진행형이다. 현실과 현금에 목마른 사람들은 더 이상 기다려 보는 것에 지쳐 있다.
얼마나 더 참고 기다려야 하는가.
지구촌 곳곳에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 자행되고 있는데 하늘은 아직도 그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하늘의 심판은 아직도 유효한 것인가. 아니면 헛된 환상에 사로잡혀 날구지를 하는 사람들의 망상일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당시의 제자들만이 일시적으로 누린 목격담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을 전해 들은 사람들의 과장된 이야기였을까. 전해지는 소문은 살을 붙이게 마련이다. 신약성경의 증언은 소문의 확대 해석이었던가.
수많은 추종자들은 2천년전의 이야기를 한점 의혹도 없이 믿고 따랐다. 오직 그것이 진리이며 영원한 것이라고 믿고 모두 자신의 생애를 거기에 걸었다. 하지만 아직 그에 대한 답은 없고 사람들은 지쳐가고 있다. 그 이면의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못된 다단계 판매 방식 같은 것은 아닌지.
인간의 최대 관심사인 죽음이라는 문제를 내걸고 그것을 풀어주는 해결사 역할을 자임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보다 더 흥미롭고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은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수천년동안 의문 속에 갇혀 있던 과제를 천재 과학자가 과학적으로 풀려고 하고 있다. 인간은 결국 컴퓨터와 다름없다고 한다. 죽음은 작동이 멈추어진 컴퓨터와 같다는 것이다. 고장난 컴퓨터는 고쳐서 다시 쓸 수 있는 데 인간의 죽음만은 되살릴 수 없는 것일까. 아니 그것도 머지 않아 실현될 것이다. 인공장기와 혈액 등 모든 신체적 장기를 만들고 늙지 않는 세포 조직으로 변화시켜 죽음을 모르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개구리가 죽은 상태의 동면에서 깨어나듯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도 한시적인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또다른 나를 재생산하여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자에 의존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 대안을 찾아 떠날지도 모른다. 새로운 상품에 발빠르게 대처하는 상혼처럼 그렇게 훌쩍 방향을 돌릴 것이다. 고리타분한 계율에 얽매어 시간만 낭비하는 나같은 고지식한 성직자들도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을까.
나는 어떡할 것인가. 계속 절대자의 존재를 믿고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갈 것인가. 믿음과 구원이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늪 속에서 언제까지나 허우적거리고 있을 것인가.
호킹 박사의 말은 우상처럼 군림해 온 스승에게 던진 총명한 제자의 돌출적인 질 문같은 것이었다. 의심을 허락하지 않고 질문 자체를 해서는 안된다는, 순명만을 강조하는 절대지존에 대한 반발이었다. 허구의 가면을 벗기려는 과감한 행동이었다. 사지가 멀쩡한 정상인도 생각하기 어려운, 중증 장애인이 발견한 인류 최대의 사건일지 모른다.
사후세계와 천국이 없다는 것은 지옥도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얘기다. 신의 존재도 인간이 만들어 낸 우상인가. 나의 성직이라는 것도 허무개그의 옷치장같은 걸까. 이 검은 신부의 복장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덮어버리는 마법의 옷일지 모른다. 그 어떤 의문과 갈등을 차단해 버리는 참으로 편리하고 엄숙한 도구일 수도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 검은 신부복이 생각의 날개를 꺾은 것은 아닌지. 신부복을 벗어 던져야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부가 옷을 벗는 일은 극히 드물다. 여자의 유혹에 넘어갔다든지 기타 교회에서 수용할 수 없는 죄를 저질러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든지 하는 일 외에는 신부의 직위는 유지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엄격한 잣대를 대어 신부로서의 자질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하므로 신부의 파문은 쉽게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또 스스로 신부의 직분을 버리고자 할 때도 해당될 것이다. 그때는 스스로 나를 버리는 것과 같다. 아니, 나를 되찾는 것은 아닐까. 검은 신부복에 감추어진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한 비밀의 열쇠를 신부복을 내던져 버림으로써 활짝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호킹 박사의 말은 비수같이 가슴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벌침같은 아픔이 전신을 자극하였다. 사제 서품식때 바닥에 엎드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칠 것을 각오했던 순간 느꼈던 그 아프도록 짜릿한 느낌 이후 처음이었다. 그만큼 호킹 박사의 말은 절대자의 말처럼 강렬하게 파고 들었다.
그뿐 아니라 또다른 과학자들이 우주 탄생에 대한 연구를 잇달아 발표하는 것을 보고 나의 절대자에 대한 믿음은 한층 더 흔들렸다. 그들은 확신하듯 말하였다. 태초에 말씀은 없었으며 오로지 한 점이 있었다고. 고온 고밀도의 한 점이 순간적으로 대폭발을 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다고. 빛보다 빠른 속도로 급팽창하여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 그런데 그것조차도 태초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말씀이 한 점이 되어 시작되었다면 말이다. 믿어야 할 것인가. 믿지 말아야 할 것인가. 머리가 아파 왔다.
<믿음>이란 도대체 무슨 정체불명의 암덩어리같은 건 아닐까. 각자에게 부여된 고유의 감정일진대 믿음을 통해 절대자의 존재를 인식하라는 것으로 보인다. 믿음의 자유라는 것까지 주어 절대자의 흥미를 유발시킨 것은 아닌지. 무조건적인 믿음은 재미가 없을뿐더러 선택의 기회를 부여하여 진국만 건져 올리겠다는 심사가 아닐지. 한데 이런 식으로 나가면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밖에 안된다. 잠시 멈추고 숨을 가다듬자.
죽음에 대한 의문은 절대자의 존재, 우주 창조론까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믿음의 자유라는 올가미에 걸려든다. 선택할 권리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 선택은 남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주인이라는 것이다. 주인. 그렇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영육의 주인은 나다. 한시도 쉬지 않고 작동되는 몸의 주인은 나인 것이다. 어떤 다른 매체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나 자신이 주인공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호킹 박사는 진정한 자유인이요 주인 행세를 한 것 같다. 인간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며 고장난 컴퓨터와 같다, 천국과 사후세계는 없으며 인간이 만들어낸 동화일 뿐이다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권리를 스스름없이 행사한 것이다.
나는 여태껏 자신의 권리를 행사해 본 기억이 전혀 없다. 절대자의 계율에 길들여져 그렇게 순한 노예처럼 지내 왔다. 외롭게 갇혀 지낸 섬노예처럼 말이다. 주인 의식을 일깨워준 호킹 박사에게 감사해야 할 듯 싶다. 지금까지 나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순명해 왔던 하느님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제 고해소에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며칠동안 마음의 정리를 하고 관할 교구에 신부직을 사임할 뜻을 전하였다. 교구에서는 극구 만류하였지만 나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성당을 떠나는 날, 그동안 함께 성직을 수행했던 신부, 수녀와 신자분들이 조촐하게 환송을 해주었다.
별다른 준비없이 나왔으므로 특별히 갈 곳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성당에서 마련해 준 약간의 여비가 전부였다. 어려움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보호막도 없이 광야에 내던져진 어린 아이처럼 나는 며칠전 그렇게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한 새로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