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스님이 암자에 기거하게 된 것은 올 봄부터였다.
암자는 절에서 북서쪽으로 십분쯤 걸어 먼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에 있었다. 두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생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스님은 개의치 않았다.
스님의 일상은 참선이 주된 일과이다. 절에서 하는 새벽 예불을 하지 않는 대신 네시에 일어나 참선을 시작으로 하루를 연다. 한시간 정도의 참선이 끝나면 경전을 읽고 백팔배를 한다. 그리고 식사 시간과 건강을 위한 운동으로 산정상을 한바퀴 돌아오는 것을 제외하면 참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이한 게 있다면 스님의 방에 바둑판이 있다는 것이다. 오래된 낡은 갈색 바탕의 은행나무로 만든 것으로 방 한켠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스님은 참선을 할 때면 바둑판을 앞에다 놓고 눈을 감았다. 참선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냥 참선을 하면 쓸데없는 잡념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으나 바둑판 앞에 앉으면 바둑을 두듯 생각에 잠겨 효과적인 참선을 할 수가 있었다. 마치 주판을 머릿속에 그려 암기를 하듯이.
방 한쪽의 간이 책꽂이에는 불교와 바둑 관련 서적이 있었다. 바둑은 관자보, 현현기경, 기경중묘, 발양론, 사활묘기, 현람 등 바둑고전과 현대 명기보가 담긴 책 몇권이었다.
스님의 법랍(法臘) 50년. 세속 나이 67세였다. 스님은 출가하기전 동네 어른들이 두는 바둑을 어깨 너머로 배운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바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년 전부터였다.
경남 Y절에 있을때 바둑에 조예가 깊었던 M스님 때문이었다. M스님은 신자들의 기우회 고문으로 있으면서 일년에 한번씩 바둑대회를 열어 불자들의 열띤 호응을 받고 있었다. 옆에서 구경만 하던 H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바둑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M스님을 통해 구입한 바둑책을 불경과 다름없이 대하였고 앞에서 열거한 책들을 외우다시피 거의 다 섭렵하였다. 수년간에 걸친 바둑 공부는 놀랄만큼 성장하였다. M스님을 능가했을 뿐아니라 불자 기우회에서 최강자로 꼽히는 사람도 H스님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자신을 얻은 H스님은 전국 규모의 일반인 바둑대회에도 나갔는데 녹녹치는 않았다. 첫해에는 예선 리그 탈락. 두 번째도 예선 탈락. 그러나 세 번째는 8강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스님의 괴력에 참관자들도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였다. 스님의 세속 대회 경력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 스님은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님이 대회에 나가지 않은 이유는 바둑이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 수행에 전념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힌 까닭이었다. 스님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면 그것은 일종의 외도였다. 바둑 실력을 남과 겨루어 보고 싶다는 자체가 세속적인 욕심의 발로라고 생각하였다. 그들과의 승패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승리의 쾌감을? 패자의 쓰라림을? 수행자로서는 자제해야 할 것이 아니던가. 아, 그럼 왜 바둑을 배웠던고?
스님은 뒤늦게 깨달은 셈이었다. 누구와 실력을 겨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마음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었다고. 바둑을 통해서 나를 알고 부처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참선과 바둑은 말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매일 반복되는 스님의 일상은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스님의 머릿속은 날로 새로운 기운이 들어찼다. 겉은 무덤덤해 보이나 속은 나날이 변화되고 있었다. 한걸음 두걸음 느린 듯 하면서도 한단계씩 더 나아가고 있었다. 바둑에서 똑같은 판이 반복된다면 흥미는 반감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새롭게 시작되는 한판의 바둑이 매번 설레임으로 시작되듯이 스님도 매일 설레이는 맘으로 참선에 임하였다.
스님의 참선은 앞서 언급했듯이 바둑판을 앞에 놓고 좌정한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 순간 바깥 세계의 광명은 차단되고 어둠이 맞이한다. 마치 밖에서 영화관 속으로 불쑥 들어가면 암흑 천지가 되는 것처럼. 처음엔 갈 바를 몰라 허둥거리다가 더듬거리며 제자리를 찾아간다. 어둠 속의 영화관은 영사막의 현란한 조명으로 주변을 돌아볼 수 있지만 참선은 고요한 어둠만이 지배하였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차츰 주위의 사물을 감지한다. 어둠이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시발점이었다.
스님이 눈을 감는 순간 암흑의 터널 속에 잠시 갇힌 뒤 또다른 입구가 기다린다. 그곳을 빠져 나가면 좀 더 밝은 회색지대가 나타난다. 거기에 옅은 안개가 걷히며 바둑판이 놓여 있다. 마치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스님 앞에 놓인 바둑판이 어느새 스님의 머리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신기한 마술을 보는 듯 하다. 눈 깜짝할 사이 관객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똑같은 것을 여러개 생성해 내는 기묘한 마술.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참선은 마술이 아니다. 바둑도 마술이 아니다. 스님 앞에 놓인 바둑판이 스님의 머릿속에 들어앉은 것은 허공 속에서 새롭게 창출한 그래픽이었다. 스님은 모든 것을 벗어 던진 채 머릿속에 펼쳐진 참선의 바다, 끝도 시작도 없는 허허로운 바둑판 위에 뛰어 든다. 삶은 무엇이며 나는 왜 여기 앉아 있는가. 참선은 무엇이고 바둑은 또 무엇이런가. 단지 눈앞의 사물에 불과한 것인가. 물체가 눈에 보이니 물건인 줄 알고 눈에 보이지 않으니 없는 것으로 여기는가. 생명은 무엇이며 지금 내가 숨을 헐떡이는 것이 생명의 실체라는 것인가. 산다는 것과 살아있다는 것, 죽음이라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다른 것인가. 생각은 무엇이며 머릿속에서 맴도는 알 수 없는 화두의 실체는 무엇인가.
스님의 참선은 늘 혼돈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옷장을 열어 보는 것 같은 그러나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상념이 뒤따랐다. 혼돈의 와중에서도 스님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바둑판이었다. 스님이 있음으로 바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둑이 있음으로 해서 스님이 있다는 것이었다. 스님이 태어나기 이전에 바둑은 존재했고 바둑은 우주 그 자체였다. 끝도 깊이도 알 수 없는 무궁무진한 대우주를 바둑판 안에 모든 것을 압축해서 담고 있었다. 천체 물리학자가 하늘을 쳐다보고 문제를 풀다가 한숨을 내쉴 것이 아니라 바둑 안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스님은 오늘도 그렇게 바둑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바둑판 위에 발을 내딛을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낀다. 마치 속세의 번뇌를 탈피하고 피난처를 찾은 느낌, 허물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는 곤충과 동물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스님은 오늘따라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하늘을 나는 연의 연줄이 끊겨 그것을 잡으려다 허우적거리는 것과 같은. 스님은 평소처럼 바둑의 숲속을 거닐기 시작했지만 방향 감각을 잡지 못하고 허둥대었다. 왠지 다시 되돌아 가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우려가 현실이 되어 갔다. 스님은 바둑판 속 미로를 헤매이기 시작했다. 전과 달리 바닥은 진흙으로 질척거렸고 햇볕은 숲에 가리어 칠흑같은 밤을 연상시켰다. 어느 곳으로 발걸음을 떼어 놓아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니 발목은 이미 바둑의 늪에 빠져 움직이기조차 어려웠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몸동작이 둔해지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저 멀리 어디에선가 희미한 불빛이 가느다란 실핏줄처럼 뻗어 왔다. 그 갸날픈 불빛이 스님에게 닿는 순간 몸이 요동쳤다. 몸속에서 뜨거운 섬광이 휘몰아쳤다. 한동안 격렬한 움직임으로 경련을 동반했다. 잠시후 스님의 몸부림이 정지되었다. 그와 동시에 의식이 끊어졌다. 스님의 몸에서 영혼이 이탈되었다. 해탈이었다. 스님이 앉은 채로 열반에 든 것이었다.
스님이 열반에 든 것을 절에서 안 것은 며칠 뒤였다. 심부름하는 동자승이 왔다가 기겁을 하고 절에 알린 것이었다.
열반에 든 스님은 마치 잠을 자는 것 같았다. 말로만 듣던 좌탈입망.
연약하면서도 이목구비는 뚜렷하였고 입가에 미소가 번질듯 말듯 하였다. 죽었으나 죽지 않고 살아 숨쉬는 모양이었다. 스님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논의가 시작될 즈음 주지 스님의 말에 모두가 놀라워했다. H스님의 시신을 현재 있는 상태 그대로 보존하되 불상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예산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반론이 없지 않았으나 H스님의 높은 덕망을 오래도록 보존하고픈 주지 스님의 깊은 뜻을 받아 들여 그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였다.
H스님의 불상 작업은 빠르게 진척되었다.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불상의 위엄을 갖추도록 하였다. 금색으로 도금을 하되 화려함을 내세우지 않았다. 시신의 방부 처리는 최첨단 기법을 도입하여 불상 작업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이마에는 살아생전 고뇌에 번민한 듯한 굴곡진 주름이 몇가닥 내처럼 흘러내렸고 입가에는 미소가 잔잔히 흐르는 듯 하였다. 목과 가슴엔 불필요한 장신구는 없앴다. 두 손은 하늘을 감싸 안을듯이 다소곳이 퍼져 있었다. 마치 어느 시골 안방에 앉아 있는 노인네를 보는 듯 하였지만 몸 전체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뿜어져 나왔다.
H의 불상을 한번 마주치면 그의 눈빛에 빠져 헤어나기 힘들었다. 금빛이 발산하는 찬란한 색조가 주위를 휘감아 맴돌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암자 안팎의 풍경도 불상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엄숙하고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H스님의 불상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산채로 부처가 된 스님, 바둑을 두다가 신선이 된 스님, 인간만사 모든 번뇌를 극복하고 등신불이 된 스님 등등. 소문은 꼬리를 물고 전해졌다. 암자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암자 주변에 천막을 치고 기거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절 주변에는 몰려든 차량과 사람들로 때아닌 북새통을 이루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절에서도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방문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막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소문을 듣고 발빠르게 움직인 곳은 K시였다. 불상의 내력을 안 K시에서 이것을 관광상품화하겠다는 복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절에서는 불상을 상품으로 보는 것이 마땅찮아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H스님의 업적을 기리고 불심을 전파하는 홍보 차원에서 수용하기로 하였다.
결국 k시와 협약을 체결하였다. 암자와 절 주변을 정비하고 운영관리를 K시에서 하되 시에서는 매년 일정액의 지원을 하기로 한다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외지 관광객을 보다 많이 유치하여 침체되어 가는 K시의 경제를 회복시켜 보자는 뜻이 깔려 있었다. K시가 암자 운영권을 확보한 뒤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하였다. 절 입구와 주변도로를 확대 포장하고 인근 산을 깎아 부족한 주차시설도 마련하였다.
오늘도 K시의 외곽에 위치한 암자에 가면 사람들이 방문하여 H스님의 불상에 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불상으로 변신한 H스님은 살아있는 듯한 눈을 치켜 뜨고 불쌍한 중생들을 내려다 본다.
세상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은 듯한 홀가분한 표정. 안쓰럽고 연민에 가득찬 눈길. 죽음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옷을 갈아 입은 의연한 자태. 황금색으로 치장한 몸매는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한다. 세상의 고통을 아우르고 평화로움이 깃든 얼굴, 도톰한 입가에 잔잔한 미소마저 흐른다. 그리고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은 바로 앞에 놓여진 바둑판이다.
그리고 말하듯 끊임없이 읖조리고 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