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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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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바둑의 탄생
2013-12-19 오후 5:28 조회 8607추천 5   프린트|스크랩
    


  오청원은 바둑을 조화(調和)라고 했다. 흑과 백이 어우러지는 고도의 경지를 섭렵하여 터득한 심정으로 한 말일 것이다. 모두가 이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기성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게 한다.
 
  그런데 이것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말을 하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그는 이미 흑백의 조화를 넘어 새로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요즘 정치권에서 새정치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그 시대마다 항시 새정치를 한답시고 떠벌리지만 지나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 불신을 쌓아 정치를 국민들로부터 동떨어지게 한다.

 

  그럼 새정치란 어떤 것일까. 항상 새로운 옷을 갈아 입을 수 있을까.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로 새롭게라는 말이 있듯이 그렇게 날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은 쉽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한데 바둑에선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 매번 두는 바둑이 똑같을 수 없기에. 수천 수만판을 두어도 같은 바둑을 둘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는 바둑은 늘 새롭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사람은 그런 의미의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바둑을 두고 있었다.  


  지난 가을의 문턱에 접어들 무렵, 세간의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홀로 고성산을 올랐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주 오르는 편이지만 오를때마다 힘이 들었다. 고성산은 곳곳에 휴게의자가 있어 숨이 차면 중간에 쉬어 갈 수 있다. 산의 중간 지점을 올라가자 좀 쉬어가고 싶었다. 저 위쪽 휴게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중년으로 보이는 사내가 무슨 책을 보고 있었다. 흘낏 훔쳐보았더니 웬걸 바둑책이었다. 나와 같은 취미의 등산객을 만나 내심 반가워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사내의 행색을 자세히 보니 남자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여자같기도 하였다. 도무지 뭐라고 확실하게 구분을 지울 수 없었다. 바둑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내가 말을 걸었다.

 

  - 바둑을 잘 두시는가 보죠?


  - ……


  사내가 못 들은 척해서 다시 한번 물었다. 사내는 그제서야 대답하였다.


  - …네. 조금. 가는 길 정도….


  사내는 반말처럼 들리는 어조로 말하면서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 가는 길 정도면 수준을 가늠할 수 없는 말인데 어찌보면 바둑을 통달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길을 물어가는 초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책을 보아하니 꽤 고수 같군요.


  - 글쎄요. 자칭 고수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형씨도 바둑을 좀 두시는 모양이죠?


  - 아니 저는 둔다기보다 조금 좋아할 정도죠. 근데 책 제목이 궁금하군요.


  - 아 이 책 말이죠? 오청원의 신포석론이예요. 볼수록 재미있어요.


  사내는 책을 덮고 확인이라도 시켜줄 듯이 앞 표지를 보여주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사내와 대화를 나누었다. 산에 책을 갖고 와서 본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무겁고 복잡한 머리를 식히러 오는데 책을 보는 게 부담스럽다는 것, 나는 일반 교양서적보다 부피가 얇은 작은 시집을 가져와 본다는 것, 하지만 역시 그냥 와서 산과 침묵의 대화를 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 등등.


  사내는 바둑책 말고 바둑판까지 갖고 온 모양이었다. 사내는 책을 한동안 읽고 나서 접이식 휴대용 바둑판을 펼쳤다.


  - 바둑 한수 할까요? 


  사내가 먼저 제의를 했다. 갑작스런 제안에 나는 당황하면서 내심 사내의 실력이 궁금하여 흔쾌히 응하였다. 치수는 일단 호선으로 하기로 했다. 첫 만남에서 상대의 급수를 불문하고 두는 것으로 암묵적인 교감을 한 셈이었다. 바둑을 두다 보면 자연스럽게 실력이 드러나게 마련이므로.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그가 꺼낸 바둑돌이었다. 돌의 색깔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모두가 회색이었던 것이다. 흑백의 구별이 되지 않은 돌로 무슨 바둑을 둔단 말인가.

 

  - 아니 이건 돌이 이상하군요. 처음 보는 바둑돌인데요?


  - 아, 네. 이건 제가 만든 겁니다. 세공업자에 부탁해서요.


  - 이걸로 어떻게 둔다는 건지?


  - 자세히 보면 돌 중간에 흑백의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두게 되면 괜찮아 질 겁니다. 


  사내의 말에 가까이 들여다 보니 중앙 부분에 흑백의 빛깔이 작은 점처럼 찍혀 있었다. 사각 모양의 작은 점인데 좀 떨어져서 보면 사각이 원처럼 변하는 것 같았다. 시력이 약한 사람이 두기에는 불편할 것 같기도 한데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시력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안경을 쓰고 있는데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흑백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내는 왜 이런 돌을 만들었을까.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사내가 말했다.

 
 - 여태까지 수없이 많은 바둑을 두어 오다가 느낀게 바둑이, 바둑이라는 세계가 흑백의 돌처럼 어쩌면 흑백논리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좋게들 말해서 흑백의 조화라고도 합니다만 그 반대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거지요. 게임의 원리상 승패가 결정되어야 하는데 승패가 갈리는 시점에서 승자와 패자가 느끼는 쾌감과 좌절감을 조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잔인한 자기 합리화가 아닐까 하는. 그 감정의 경계선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상대방에 대한 공격, 비난, 미련 등이 앙금처럼 남아 궁극에는 자신마저 통제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거지요. 해서 그런 감정을 뛰어 넘는 뭔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 나름대로 궁리 끝에 만들어 본 겁니다.
 

  - 좋은 발상이긴 합니다만 구태어 인위적으로 색깔까지 바꿀 필요는 있을까요?


  - 물론입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 조절하기 어렵다면 물리적으로라도 시도할 필요성은 있다고 봅니다. 이 돌로 둬 보시면 알겠습니다만 돌을 놓을때 보면 회색 빛깔이 오히려 맘을 편하게 해주는 면도 없잖아 있지요. 흑과 백의 색을 이미 포용한 상태에서 바둑을 둔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 회색분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 눈 앞의 현실은 흑백을 뛰어 넘은 수들이 놓여지지 않습니까?

 

  나는 회색 바둑돌 안의 작디 작게 수놓여진 흑백 무늬를 구분하면서 바둑판 위에 한수씩 착점해 나갔다. 처음엔 눈이 아려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차츰 적응이 되었다. 흑백이라는 극단적인 색이 아닌 회색 빛깔이 머릿속을 채우면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흑백의 관념은 사라지고 회색빛의 안개만이 바둑판 위를 뒤덮었다.

  

 내가 흑을 쥐고 두었지만 백을 쥔 사내의 실력은 예상외로 만만치 않았다. 자칭 1급 강에 속한다고 믿고 있는 나였지만 사내는 쉽게 나를 갖고 노는 것 같았다. 맞수 상대가 아닌 최소한 두점 차이의 강자 임이 분명했다. K시에 이런 강자가 숨어 있었다니. 첫 판은 불계로 패하고 말았다. 시작은 좋았으나 중반을 넘어 양곤마로 몰린 말 한쪽을 키워 죽였는데 일찌감치 돌을 던져야 했을 판이었다. 
 
  처음 만난 상대와는 삼 세판은 두어야 어느 정도 기력 차이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세 판까지는 두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더 두고 싶은 맘이 없어졌다. 워낙 강한 상대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에. 도리어 사내가 한판 더 두자고 하였다. 나는 어쩔수 없이 한판 더 두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한번 더 놀란 것은 사내가 또다른 바둑알을 내놓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녹색과 빨강 바둑알이었다. 사내는 자랑하듯 말했다.


  - 이것도 얼마전 새로 만들어 봤는데 형씨한테는 처음 선 보이는 겁니다. 회색알 보다 더 의미가 있는지도 몰라요. 자연 친화적인 색상은 바로 이게 더 가까울 수도 있으니까요. 녹색은 대자연의 푸르름을 빨강은 태양을 상징하지요. 굳이 구분을 하자면 녹색은 흑, 빨강은 백이라고 할까요. 진정한 천지의 조화는 흑백 뿐아니라 녹색과 빨강 이 네가지 색이 어우러져야 완전하다고 할 겁니다. 


  두 번째 바둑을 두었다. 이번에는 내가 빨강(백), 사내가 녹색(흑)을 들었다. 사내의 손놀림은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묵직하면서도 날렵한 사내의 착점은 바둑판 위에 굉음을 내고 산울림이 되어 계곡으로 번져갔다. 나는 이미 사내에게 심정적으로 지고 있었다. 나의 착점은 힘이 없었고 두려움마저 느껴 가늘게 떨기까지 했다.  


  바둑판 위의 녹색 빨강이 어우러지면서 응시하던 내 시야에 검보라빛이 구름처럼 흘러갔다. 나는 눈을 껌벅이며 허둥댔다. 돌을 놓는지 구름 위를 걷는지 눈자위가 욱신거렸다. 얼굴은 홍조가 되어 화끈거렸다. 마치 사자 앞에 놓인 먹이감처럼 나는 그렇게 사내에게 먹혀 들어갔다. 보나마나 둘째 판도 불계패로 끝났다. 사내는 알수 없는 미소를 띄우며 판을 거두었다.  


  나는 힘이 쭉 빠진 채로 사내를 훔쳐 보았다. 한수 잘 배웠다는 말을 할 기력도 남아 있질 않았다.


  처음 본 대로 아직도 사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사내는 나의 의중을 눈치 챘는지 고백하듯 입을 열었다.

 

  - 제 행색을 보면 다 이상하게 쳐다봐요. 사실 전 엄연한 남자예요.


  - 그럼 왜 여자같은 차림을 하죠?


  - 언젠가 트랜스젠드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 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행세한다는 것 그건 어쩌면 숙명같은 거 아닐까요. 성전환 수술까지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의 시각에선 당연한 건지도 모르죠. 나도 어릴때부터 여자 같다고, 목소리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그런 소릴 많이 들었지요. 바둑을 알고 나서 나도 남녀를 초월한 아니 흑과 백을 초월한 바둑을 두고 싶다는 맘이 들었어요. 바둑교실에서 여자같다고 왕따를 당했지만 실력으로 녀석들을 뭉개버렸지요. 통쾌합디다. 그래 작심했지요. 바둑 뿐아니라 심적으로 녀석들을 능가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한데 빗나간 건지 아닌지 모르지만 어느날부터 나는 차림새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여장을 하게 되었지요. 남자이면서 여자로 보인다는 것 흥미로운 일이었죠.


  -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까?


  -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로 하니까 별로 그런 점은 못느꼈어요. 그리고 바둑 때문에 그랬던 것이기도 하고요.


  - 바둑때문이라니요?


  - 내가 새로운 바둑알을 만들게 된 것과 연관이 있어요. 흑백의 구분을 초월하자면 내 스스로 남녀 구분이 안가는 행색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실제 행동을 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바둑알을 구상했던 겁니다. 바둑 룰 자체는 바꾸기가 쉽지가 않아서 우선 바둑알만이라도 변혁을 시도해 보자고 해 본 거예요.


  사내는 바둑알을 만들고 나서 한동안 집안에만 보관해 오다가 얼마전부터 산에 올라와 혼자 기보를 놓아 보곤 했다고 한다. 실제로 바둑을 둔 건 내가 처음이었다고.


  진지하면서도 엉뚱하고 황당하기만한 사내의 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막강한 바둑 실력과 범상치 않은 사내의 행색에서 그의 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마력이 숨어 있었다.

 

  가을의 태양은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계곡의 그림자가 평소보다 빠르게 드리워졌다.

  나는 사내와 다음을 기약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정상으로 오를 맘은 없었다. 방향을 틀어 하산하기 시작했다.

  조금 가다가 뒤돌아 보니 사내는 아직도 휴게의자에 앉아 바둑책을 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며 바둑판에 돌을 놓듯 조심스럽게 한발자국씩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산을 내려오면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나는 오늘 살아있는 바둑의 산신을 만났는지도 몰라. 흑과 백을 초월한 진정한 바둑의 초인을….

  

 

 

 

┃꼬릿글 쓰기
팔공선달 |  2013-12-20 오후 8:01:48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이 글이 실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늘 기발한 님의 글을 봐왔으니...^^ 아마도 글 쓴이의 생각일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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