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위선자다. 성은 <위>가요 이름은 <선자>다.
언뜻 들으면 여자 이름같기도 하다. 위씨는 원래 중국에서 전래되어 온 성씨로 알고있는데 우리나라에 정착되기까지는 숱한 어려움을 겪은 듯하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나는 나의 시조에 대한 내력을 모른다. 족보를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모른다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는 얘기와 같다.
자신에 대한 탐구가 없으면 발전이 없다고 봐야 한다. 발전이 없으면 정체나 퇴보밖에 없는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의 흐름에 비추어보면 정체도 퇴보에 속한다.
내가 나 자신을 한번 깊숙이 들여다보기로 한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컴퓨터에 내장된 나의 개인 신상명세서란을 검색하고, 그중에 심성란의 키를 두드려보았다. 심성란은 그동안 내가 행동하고 느낀 감정을 틈나는대로 단편적으로 입력시켜 놓은 곳이었다. 머릿속의 생각을 그때 그때 붙잡아 저장시켜 놓지 않으면 언제 다시 생각을 되살릴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컴퓨터의 기능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다.
모니터 화면에 나타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위선자. 그래 나는 위선자다. 이름 그대로 위선만을 일삼아 왔다. 이름을 위선자로 지어준 부모를 원망한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은 하나의 형식이다.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고 행동만 옳게 한다면, 이름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속은 위선으로 가득차 있다. 지금 나라 경제가 혼란에 빠져있는데, 이제 과거의 잘 잘못을 따지기전에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하는데, 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눈에 들어오는 유혹들을 물리치지 못하고 주저하고 망설이며 빠져들어갈 때가 많다. 예쁜 여자를 보면, 아니 치마를 둘렀다 하면 마음이 동하고 성욕을 발동시키려 한다. 괜찮은 물건이다 싶으면 더럭 사고싶은 욕망을 뿌리치지 못한다.
경제가 어렵다는데 갱시기를 너무 자주 먹는 경향이 있고, 경제를 망친 책임이 국민의 일원인 나에게도 조금이라도 있을텐데, 자꾸만 국정 책임자와 경제 각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술먹는 것도 그렇다. 술먹는 사람에게 적당히 먹으라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소귀에 경을 읽는 격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소귀에 경전을 걸어놓고 사진이라도 찍어 놓으면 그것은 영원히 남는 것이다. 술이 주는 이익이 있지만, 과음의 폐해는 더 논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간관계를 원할히 한답시고 먹은 술이 언제나 <적당한> 선을 넘어 위선의 추악한 형태로 남았다. 그리고 그것이 곧 국가적 피해 손실로 이어진다. 술꾼 한사람 한사람이 끼치는 경제적, 사회적, 국가적 손실은 수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나의 성격은 그 내부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리무중이다. 양파의 속껍질처럼 겹겹으로 쌓여 가면의 성곽을 이루고 있다. 남을 위하는 체 하면서 남의 불행을 은근히 기뻐하고 거기에서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려 한다.
비굴한 자. 추악한 자여. 겉으론 조용하고 겸손한 체 하면서 온갖 더러운 상념에서 헤어날 줄을 모른다. 아니, 은근히 그런 못된 생각을 즐기려 하는 것은 아닌가. 위선의 가면에 중독되어 영영 헤어날 수 없는 늪지대로 변한 것인가. 그냥 서서히,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스스로의 게으름을 탓하면서 악의 영역에 영합하고 안주하려는 것은 아닌가. 친절을 가장하고, 혹은 위장된 표정으로 한겹씩 더욱 굳건한 울타리를 만들어 스스로를 묶고 폐쇄시키려는 것은 아닌가.
결국에는, 죽음의 관문에서도 위선의 두꺼운 형체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한낱 장작개비 불쏘시개로 태워 없어질 소모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죽음앞에 당당해질 수 있는, 진실함과 깨끗함으로, 사랑스럼 표창을 받을 수 있는 그래서 위선의 가면을 훌훌 털어버리고, 죽음의 관문을 편하고 기쁜 마음으로 통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위선의 온갖 것들은 죽음의 녹즙기에서 모두 다 벗겨지게 마련이다.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려면 끊임없이 회개하고 자신을 정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죽음의 저쪽,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녹즙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의 어두운 터널 한쪽 구석에서 처박혀 더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짓씹으면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미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곤충의 애벌레가 고치속에서 빠져나와 탈바꿈을 하지 않으면 나방이 되어 날 수 없듯이 위선자의 죽음도 그러할 것이다.
위선자여. 가면을 벗어던져라. 부끄러워도 좋다. 창피해도 좋다. 쑥스러워도 좋다. 수치스럽고 자존심이 상해도 할 수 없다.
하루 한꺼풀씩, 한 장씩 위선의 가면을 벗기자. 내가 벗기 힘들면 남한테 좀 벗겨달라고 하자. 그리하여 위선이 아닌 참선을 향해서, 한발짝씩 나가보자. 억지로라도 그렇게해서 조금씩 나가보자. 그러면 목마름을 추길 수 있는 샘물에 행여 손이 닿을수 있지도 않겠는가.
위선…위선자…썩어없이질 위선자여…
여기서 심성란이 끝나 있었고, 모니터 화면에서는 빨간 적색 동그라미가 신호등처럼 급하게 깜박였다. 그리고 그 밑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1. 그동안 평소 컴퓨터 업무에 협조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 오늘밤을 넘기기전에 위선의 가면을 벗는 작업에 착수해야 합니다.
공사기일을 더 연기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컴퓨터는 자동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협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씀드리
는 것입니다. 컴퓨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입력된대로, 당신들 인간,
위선자들이 제공한 원인대로 행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3. 컴퓨터가 폭발하면, 당신은 물론 모든 사람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됩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더 늦기전에 지금 당장 일을 시작하십시오. 오늘밤
을 절대 넘기지 마십시오.
당신의 위선은 극에 달해 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수 없는 마지막 극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