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햇살이 책상위에 길게 드러누워 있을 무렵 낯선 사내 하나가 007가방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내는 들어서자마자 무슨 긴요한 볼일이 있는듯한 표정을 짓더니 간단한 예를 표한 후, 봉자빈 계장 책상쪽으로 가서 가방을 열어젖혔다. 가방 안에는 온갖 것이 들어있었다. 없는 것이 없는 그야말로 만물상자였다.
가방 백화점이라고나 할까. 카메라, 면도기, 톱, 넥타이, 혁대, 전자계산기, 녹음기, 라디오, 쌍안경, 손목시계, 라이타, 목걸이, 칼, 열쇠고리 등등…. 정력에 좋다는 외제 수입약까지 있었다.
사내는 세낸 점포 주인처럼 상품들을 하나씩 책상위에 꺼집어 내놓았다.
봉자빈 계장의 책상은 순식간에 상품 진열대로 변해버렸다. 사내가 상품을 책상위에 마구 늘어놓자 봉자빈 계장의 성깔이 불쑥 움직였다.
“누구 허락받고 내 책상위에 막 벌리놓는기요? 안그래도 지금 바빠 죽겠구마는.”
“하이고 미안합니다 계장님. 조금만 설명드리면 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잠깐이면 끝납니다.”
사내는 그러면서 외제 알약부터 들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사무실내에서 장시간 앉아 일하시다가 피로하신 분은 이 알약 하나면 그만이라는둥 이 알약을 먹으면 오늘밤부터 당장 효과가 나타난다는둥 떠벌렸다.
직원들이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 카메라말입니까? 일젭니다. 이십 오만원만 내세요. 톱은 삼천원입니다. 그 손목시계는 홍콩서 직수입한 겁니다. 육만 오천원짜린데 현찰주시면 육만원에 드리죠. 계장님 전자계산기 갈으셔야 되겠네.”
사내는 봉자빈 계장에게 말을 걸었다.
“갈기는 왜 갈아요, 아직 한참은 더 쓸낀데.”
“몇단위까지 나오십니까? 보니까 열자리까지밖에 안나오는기네. 최소한 열두자리까지는 나와야 제대로 써먹지.”
사내의 말투가 봉자빈 계장의 비위를 거슬렸다. 그렇잖아도 자신의 책상위에 함부로 전을 벌여놓은 것이 심사가 못마땅하던 참이었다.
“이 양반아 그래도 십년동안 아무 탈없이 써왔는데 캐사여.”
“그런기 아이고. 전자계산기 하나 살 형편도 못되는 것 같아서 한번 해본 소린데.”
“내가 그렇게밖에 안보이요? 참말로 가마이 듣고 있으이 기분나쁜 소리만 틱틱 해샀네.”
“그라마 계장님이 이 카메라 한 대 살 수 있겠소? 보겟또에 단돈 십만원도 없는 사람이 뭘 캐샀소. 보이 평생 민서기밖에 못할 사람이.”
참고 있던 봉자빈 계장의 성질이 툭 터졌다.
“뭐요? 당신 말 다했소? 카메라 아이라 그 가방안에 든거 몽땅 다 살 수도 있어 이 양반아. 쪼매하이 얼굴 새카맣게 앉아있으이 눈에 보이는기 없나 진짜.”
사내도 상기되는 성싶었다.
“얼굴에 딱 써있는데 뭘 캐샀소? 술 여자 좋아하겠고 속은 텅텅 빈 양반이. 이 가방안에 든거 돈으로 따지마 백만원도 넘어. 그런데 가방채로 몽땅 사겠다고? 당신이 사겠다카마 단돈 삼십만원에도 줄 수 있어. 그런 돈도 없는 양반이 성질을 내? 성질낼걸 내야지. 당신이 이걸 사마 내 손에 장을 지지지. 장을 지져.”
사내는 봉계장의 감정을 긁어대며 <계장님>을 <당신>으로 격하시키고 있었다. 반말투와 당신이라는 소리에 봉자빈 계장은 자리에서 그만 벌떡 일어났다. 직원들 앞에서 당하는 모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굴 놀리나? 당신이라이. 그거 얼마라 캤소? 삼십만원? 정말로 삼십만원캤제? 여기 딱 이분만 기다리. 아이 일분만.”
옆에서 직원들이 쿡쿡 찌르며 만류를 했으나 봉자빈 계장은 급히 나가더니 어디서 구해왔는지 현찰 삼십만원을 갖고 들어왔다.
사내는 매우 당황하는 것같았다. 그러나 어쩔수없다는 표정으로 가방을 봉자빈 계장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쑥스럽다는 듯이 슬그머니 밖으로 사라졌다.
직원들은 한순간 뭣에 홀린 것같았다. 사내가 가고 난 뒤 요모조모 살펴보니 카메라는 작동이 제대로 안되었고 나머지 물품들도 겉만 번지르르했지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봉자빈 계장은 아차 싶었다. 밖으로 뛰어나가 봤으나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종의 허탈감이 덮쳐왔다. 직원들은 밥풀이 물에 풀어지듯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봉자빈 계장은 낚시에 걸려든 물고기처럼 면사무소 앞에서 헐떡거렸다.
경운기 한 대가 술에 취했는지 비틀대며 달려가고 있었고 가을날 오후의 짧은 햇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무실 벽시계 위를 힘겹게 기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