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나락이 냉해를 입어 농민들의 피해가 막심하다. 산간오지인 K면을 중심으로 한 5개면이 집중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나도 논 닷마지기나 가지고 남에게 농사를 내주고 있지만, 냉해를 입은 임차인에게 소작료를 받아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런데 나락 냉해도 냉해지만 사람들의 의식냉해가 더 심각한 것 같다. 나도 나의 의식에 냉해가 든 것을 스스로 느낀다. 머리에는 찬바람이 들고 머릿속은 텅텅 비어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독서의 해에 책 한권 제대로 읽지 않고, 오래전에 넣어두었던 것들도 다 동이 난 상태다.
피해정도를 말하면 팔십프로에 해당한다. 팔십프로 이상이면 장기구호대상자다. 조사야 남들이 하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소유한 정신적인 전답이 하나도 없으므로, 피해가 팔십프로 이상 부류에 해당될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 국가로부터 먹을 것이 나오는 것을 기대나 해볼까. 정신적으로 먹을 것은 어떤 것인가. 정신적인 영양공급도 국가에서 해 줄 것 인가.
지난번 농수산부에서 벼냉해 조사를 위하여 현지답사를 하고 갔지만, 의식냉해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나락냉해와 의식냉해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는 것인가.
의식냉해 조사는 어디 소관일까. 문화체육부 소관일 것 같은데 내가 문공사무 담당자지만, 그런 지침은 아직 귀뜸도 없다.
육체의 공허함보다, 정신의 공백감을 더 견딜수 없음에도, 정신의 배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 독서함으로써만이 공허함을 채우고 의식의 냉해를 보완할 수 있을텐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강제적인 주입은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이며 악영향을 끼칠 뿐이다. 자연스러운 유도 방법만이 최선의 길인 듯한데, 나는 TV에 이미 눈을 빼앗겼다. 저녁마다 영원한 우향우로 목뼈가 굳어버렸고, 어린 자식들과의 대화는 등을 졌다. 밥상머리의 대화는 사라지고, 육식동물의 밥먹는 소리만이 밥상 주위를 핥고 다닌다.
나는 어느새 동물로 변했는가. 아무런 생각없이 뱃속에 음식들을 채워 넣는다. 배가 부르면 밥상을 물리고, 시계를 보고 기계적으로 출근을 한다.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기계의 작동처럼 움직인다.
<나>는 없고 오직 육체라는 거풀만 보인다. <정신>이 없기때문이다. 의식의 냉해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덜거럭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냉해, 냉증, 냉각, 냉동, 이런 단어는 비생산적인 말이다. 한여름동안 냉장고에 처박힌 의식을 꺼내어 이제 겨울의 따뜻한 방 아랫목에 옮겨 놓아야 할 때다. 이 시기를 놓치면 나의 의식은 영원히 냉동된 상태로 사장될 우려가 있다. 의식의 냉해를 녹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독서라는 장작불이 필요하다. 불을 지피자. 책을 읽자. 책이 없으면 서점을 찾아가자. 서점을 찾아가서 책구경이라도 하자.
나는 나의 의식냉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서점을 찾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달았다.
술에 젖고, TV에 젖어 피곤하고 녹슨 몸을 이끌고 일요일 오후 시내 서점가를 찾았다. K서점에 들러 책들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하고 답답하던 마음이, 책 제목을 하나씩 짚어가기 시작하자 차츰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책제목은 그 책의 얼굴이므로 제목만 많이 봐도 응급처치는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정신의 공백, 의식의 냉해,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 이런 응급처방까지 생각해야 하는가. 그래도 책방에 잘 왔다는 생각을 하였고 푸근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뽑아 들고 책방을 나오는데 <살아남은 자의 알콜>을 만났다. 그는 연전에 같이 근무하던 직원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직장으로 옮긴 이용길이었다. 녀석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알콜>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책방 앞에서 만난 것이었다.
책방과 알콜은 보나마나 상극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이끌려가듯 술집으로 가서 또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셨다. 의식의 냉해가 중화되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뒷구석에 처박혀 흐느꼈다. <내 쓰러진 술병속에서> 나의 모습이 시험관속의 동물처럼 녹아들고 있었다.
냉해를 입은 나의 의식이 몽롱한 상태로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해냉의식의냉해의식의냉해의식의냉해의식의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