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그림을 대하면 잠시 그 앞에 서서 들여다볼 때가 있다. 그림 그리는 것은 젬병이나 보는 것은 별 수고도 없을뿐더러 감상하는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여자 친구가 유화(油畫) 개인전을 연다는 글이 밴드에 올라왔다. 그 친구가 그림 그린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작품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무엇을 주로 그리는지, 어떤 화풍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한산한 전시장에 몇몇 친구들과 느긋하고도 찬찬히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보기를 마치자 친구들은 탁자에 둘러앉아 차 한 잔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그녀의 그림 배우기도 듣게 되었다.

소녀가 선생님께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려요?”
    “그림을 자기 키만큼 그리게 되면 조금 알게 될 거예요.”

소녀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다. 소묘이기도 했고, 채색화이기도 했다. 그리다 지우고, 지웠다 다시 그리고. 무릎 높이만큼 쌓여 진 도화지는 어느덧 자기 키를 훌쩍 넘어 섰다.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딛듯 다소곳이 전시회를 열었다. 그게 벌써 3회째라 한다.

전시장 외벽에 걸린「May」는 유럽의 어느 성 창문과 그 창문에 드리워진 장미를 그렸다. 찍어 바르듯 덧칠한 초록 잎들은 싱그럽고, 강렬한 붉은 터치의 꽃은 여인의 입술 마냥 탐스러웠다. 내부에 전시된 같은 제목의 그림에서 장미는 한결 커졌다. 차라리 도발적이며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5월의 여인 같다.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카프리의 추억 Ⅱ」는 밝고 화사하였다. 색칠로 자아내는 꽃과 바위, 쪽빛 바다, 연회색 하늘은 보는 내내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나른하면서도 느긋할 지중해의 오후가 와 닿는다.

「카프리의 추억 Ⅰ」은 우리들이 흔히 지나쳐 버릴 소재를 그렸다. 여행을 다니면 항상 그림 소재로 될 만한 것들을 찍는다는데, 작가의 심미안은 확실히 나와 다른 바가  있다. 「소녀의 꿈」이라 이름 붙인 수국도 발걸음을 제법 멈추게 했다.

전시장 입구에 전혀 다른 화풍의 그림이 하나 있었다.
    “건물 주인이 자기 건물을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 해서 그려본 거야.”
    남포동의 여성복 매장 건물이었는데, 소녀의 그림 솜씨가 경륜이 쌓이면서 아는 사람은 아는 가 보다.

사실에 바탕하여 그리지만 똑같이 그릴 수는 없을 터이다. 거기서 짧으나마 작가의 의도나 주제 의식을 본다. 사실의 생략 또는 보완, 색감의 차이, 터치의 농도와 높이 등에서 작가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를 연상해 본다. 아니, 어쩌면 작가의 주제는 나의 관심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림에서 받는 나의 이미지, 느낌,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

서머싯 몸의〈달과 6펜스〉에서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본 의사는 ‘무섭고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것, 그러면서 또한 공포스러운 어떤 것, 그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고 한다. 그처럼 그림에는 아늑함, 무심(無心), 때로는 비구상(非具象)의 난해함 등도 있다. 그것은 작가의 세계관이자 또 다른 자기표현으로 주위를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사무실에 걸려 있는 무명작가의 값싼 그림에서도.

  탁자에 그녀가 다소곳이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다. 얼핏 중년의 아름다움이 내비친다. 그런 그녀가 언제나 꿈 많은 소녀처럼 저만의 그림으로 위안과 평화를 주는 멋진 작가가, 친구가 되기를 기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