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풍운(棋林風雲)> 제29회 LG배 세계기왕전 3번기 결승전 - 변상일 대 커제 4
커제는 결승 3차전을 치루면서 자신이 변상일에게 질 것이라는 사실을 아예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제 2국에서 규정 위반으로 인한 반칙패를 대범하고도, 담담히 수용하면서 ‘제3국에서 이겨버리면 되는 거지 뭐’라며 큰 부담감 없이 웃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커제가 마음 속으로 그려놓은 멋진 드라마가 나락으로 떨어져버리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펼쳐진다.
세상엔 인지로는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수시로 벌어진다.
제 3국 초반에 바둑사에 전해오는 그 유명한, 그 아름답기 짝이 없는 ‘쪼아붙임’이 프로기사의 정식대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드라마는 커제의 착오, 착각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바둑에서 반상에서 현실화하는 커제의 수읽기 착오는, 바둑사에 남을 착각, 오판, 실착의 한 사례로 기록이 될 것이고, 오래오래, 두고두고, 길이길이 전해질 것이다.
아마 이 바둑의 결과인 ‘커제의 예측불허, 그래서 기이(奇異)하기까지 한 기권 스토리’보다도 더 질긴 생명력을 갖고 사람의 입에서 회자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커제가 연출한 ‘놀라운 장면의 출현 과정’을 시원하게 정리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을 해보자.
<기보>
백 56까지 백의 모양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실전에서, 그것도 세계 최일류의 고수가 타이틀을 걸고 두는 바둑에서, 이런 형태의 쪼임을 당해버린 모양을, 제시한 기보처럼 완벽하고, 생생한 모습으로 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별한 행운이 함께 해야지만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극한의 쪼임을 당하게 되면, 패색이 짙어지게 된다.
말 그대로 ‘폭삭’ 망해버린 까닭이다.
그런데 이 바둑에선 바로 이 부분에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다.
당한 쪽이 망하는 게 아니라, 공격을 한 쪽이 오히려 폭망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모양이 나타난 것은 ‘커제의 착각, 수읽기의 착오’가 있어서였다.
커제가 진정한 고수였다면, 자신이 주도한 이 변화의 끝에서 돌을 내려놓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무방했을 것이다.
이런 착각 자체가 초고수의 품격, 자존심을 훼손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걸린 것이 큰 바둑이라 커제는 돌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계속해서 수순이 이어진다.
커제에겐 이 바둑의 우승 타이틀, 그리고 3억 원에 이르는 상금도 상금이지만, 이 승부에서 이기면 주어질 중국 최초의 ‘세계 메이저 급 대회 9관왕’이라는 영광과 자랑이 넘치는 ‘무형의 왕관’이 걸려있었다.
이 바둑에서 커제는 변상일을 가볍게 보고, 승부를 서두르고 있었다.
경적(輕敵)은 병가(兵家)의 금기(禁忌)인데 커제는 그 선을 조금씩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커제의 조바심이, 그리고 조급함이 깊은 수읽기를 방해할 줄이야!
이 대회 제 2국 반칙패 전까지 커제는 변상일에게 전승을 거두고 있었다.
변상일에게 커제는 높고도, 두터운 벽이었다.
상극(相剋)일 수도 있었다.
그런 커제가 바둑 초반 접전에서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고, 절망적인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2
사실 커제는 범인을 초월하는 기재(棋才)가 있었다.
중국 바둑의 자랑으로 많은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아무리 장대하고, 웅대한 벽이라도 언젠간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늘의 안배가 공교롭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 될 줄이야!
커제는 초반 접전에서 예상치 못한, 파멸 수준의 일격을 당하는 것이다.
커제가 그 수를 못 본 것은 참으로 희귀한 일이었다.
변상일이 시간을 끌며 확인을 하고, 다시 확인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커제는 한 번 쯤 의구심을 갖고 세밀히 살펴봤어야 했다.
한참 후 변상일은 커제가 오래전에 ‘내려놓은 결론 – 파멸의 함정’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다.
하하!
커제는 주저없이, 시원, 시원하게 응수를 한다.
과연 누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인가!
이렇게 백 36까지 좌상변의 수순이 일단락 되고, 흑37부터 곧바로 좌하변의 변화가 시작된다.
흑 37부터 백60까지 진행된 흑, 백 총 24수가 이 바둑의 승부를 결정짓는다.
흑 37, 흑 승률 29.0%에서 시작되어, 일차적으로 마무리되는 백60에 이르면서 백의 승률이 97.8%까지 오른다.
이미 승부가 결정이 나버린 것이다.
흑 61 이후 백 86까지 진행된 결과 백의 승률이 99.6%에 이른다.
바둑이 끝나버린 것이다.
<기보>
커제는 이 변화가 시작되는 흑 37 시점에서 변상일의 백 60을 보지 못했다.
커제가 24수 뒤 백 60을 봤으면 이 수순을 진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기보>
커제는 이 수를 읽지 못해 자멸,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고수의 바둑에서 이처럼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면서 파탄의 길로 들어선 바둑을 찾기란 쉽지 않다.
커제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데 그 방법이 18급 수준에 이른다.
흑 159 상황에서 변상일의 다음 수인 160에 기대를 거는 것 자체가 최하의 판단이요, 최악의 오판인 것이다.
변상일이 말한다.
‘확신이 서지 않아 생각하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커제는 일단 어떤 상황에서라도 다음 수를 기다려봤어야 했다.
인내와 신중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커제의 소망대로 변상일이 실수를 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커제가 심판은 갑작스러운 등장과 규정 위반 판정, 그리고 그것을 ‘경기 방해 행위’로 문제 삼아 경기장을 이석, 기권패(몰수패)를 당한 것은 정당하지도, 당당하지도, 자랑스럽지도 못했다.
소인배나 할 짓이었다.
졸렬하고, 비겁했다.
장부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남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가는 수모로부터 수많은 치욕과 방해,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전진한다.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묵묵히, 꿋꿋이 참으며, 모든 걸 이겨나간다.
뒤따르는 영광과 명예는 부수적인 것이다.
커제는 반성을 해야 한다.
소인배의 행위로 대도(大道) 잃어버린 자신의 못남을!
내가 앞서 삼성배에서의 치졸함을 지적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못난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중국도 커제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잘못된 것을 비호하지 말고, 꾸짖고 가르쳐서 바른 길로 가게 해야 할 것이다.
<기보>
흑 87부터 커제의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된다.
하지만 초반에 입은 이 상처는 찔리고, 잘린 부위가 깊어 쉽게 치료가 되지 않는다.
커제의 흑 159에 이르러 우상변 대마의 사활이 단 하나의 변수로 남는다.
변상일의 백 160이 이 바둑의 향방을 결정할 것이다.
최후의 정점에 이른 것이다.
변상일의 생각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