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에 사람은 없었는데 염탐용 고성능 카메라와 장비들이 보였다... 단지 내에 사는 사람의 차량 인지도 모르잖아. 오늘 처음 발견한 거야?”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제 눈에 처음 뜨였습니다. 아직 아파트 주민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조금 더 확인을 한 뒤에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박비서가 맡은 일에 너무 충실하게 임하다 보니 민감해진 것일 수도 있어. 그 애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잖아.”
김차관이 그의 이런 보고에도 불구하고 아무 탈 없이 그녀를 계속 소유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직은 제가 제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작은 문제가 생긴다 해도 잘 처리해줘. 나에게는 매우 특별한 애인 것 잘 알지? 내가 오랫동안 꿈꾸던 아이야. 잘 부탁하네!”
박진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렇게 그 여자를 아끼는데 문제가 있다는 보고를 어떻게 한담!’
어떻게든 스스로의 능력으로 잘 해결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만 아까 본 차는 계속 마음이 쓰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내가 너무 예민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면밀하게 지켜봐야 한다, 자꾸 마음이 쓰여.’
이미 정애의 정체를 알아챈 사람들이 생겨서 잠복하며 빌미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대는 정적이거나 언론사의 기자이거나 유투버 들이거나 호사꾼 등 다양한 부류들이 모두다 가능성 있는 대상이다. 그녀의 반복되는 돌출행동으로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선 그는 만만치 않은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나무와 같은 초목들은 늘 서두른다. 혹독한 겨울을 이파리를 떨구어 몸을 지키거나 지상으로 키워 올린 줄기와 잎을 포기하고 뿌리에만 집중해 생명을 유지하기도 하고, 씨앗을 남겨 대를 이어가기도 한다. 어떤 방법으로 이겨내든 식물들은 봄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전에 분주하게 준비를 한다. 어느 날 문득 자라난 새순들을 보고 봄을 느끼지만, 식물들이 겨울이 가기도 전 이미 오래전부터 땅속의 뿌리를 새로 만들고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 단단한 흙을 뚫어내고 새순줄기를 키워내는 수고를 한 결과물인 것이다. 봄은 길지 않고 곧 다가올 따뜻한 날에는 해야 할 것들이 무척 많은 탓이다.
신기하리만치 변한 현균이 고마워서 연지는 신바람이 났다. 머잖아 봄이 다가올 시절이 오니 그의 마음에도 따스함이 스며든 것 같아 한낮에 잠시 비춰주는 감미로운 햇살도 고마웠다.
“골프장 개장하면 우리 또 바빠지는데 그 전에 몇 박이라도 여행 다녀오자.”
“우리 스키장 다녀올까? 아직은 눈이 괜찮을 거야.”
“나는 스키 부츠도 안 신어 봤는데. 너는 탈 줄 알아?”
“나도 안타봤어. 내가 듣기로는 골프보다는 쉽다던데.”
“그럼 우리 한번 해보자.”
스키를 타러 가자는 그의 말에 연지는 들떠버렸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여럿에게 물어보는 수고스러움도 행복이었다. 서울에서 강원도의 스키장으로 가는 길은 수월했다. 심지어 어느 곳은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다. 장비가 없는 덕에 그들은 편안하게 버스셔틀이 되는 스키장으로 가기로 했다.
“장비도 없이 우리 너무 용감한 것 아니야?”
“장비만 없나! 옷도 없고, 심지어 우리 스키장 처음이잖아.”
“정 안되면 스키신고 사진이라도 찍고 오자!”
용감무쌍한 서로가 대견해서 둘은 또 사춘기 애들처럼 한바탕 웃었다.
평일에 온 스키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설이 지난 덕에 날씨도 그다지 춥지 않았고 객실료도 성수기보다 많이 저렴했다. 거기다 우연히 얻은 할인권 덕을 톡톡히 봤다. 장비를 렌탈하고 객실키까지 받았는데 골프 라운딩 비용만큼도 안 들었다.
“스키가 별게 아닌 거 같네!”
“맞아! 이럴 줄 알았으면 자주 올 걸!”
둘은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객실이 많이 비어서인지 프런트에서 스키장 뷰를 권했다. 요금은 조금 더 지불했지만 막상 객실에 들어와서 본 바깥 풍경은 비용이 문제가 아님을 여실하게 증명했다. 둘은 베란다에 매달려 사진부터 찍었다.
“이제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 사놓고 스키 신어보자.”
설레는 마음으로 둘은 마트에 들러 간단한 저녁거리와 와인까지 챙겼다.
“우리 이제 정말 스키장으로 나간다!”
스키복을 입고 장비를 들고 나서는 서로의 모습이 멋지다며 둘은 또 한바탕 웃어댔다. 그렇지만 그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부츠를 신고 플레이트에 세팅을 하자마자 스키는 제 멋대로 미끄러졌다. 폴이 거추장스럽기까지 했다.
“자기야, 나 좀 일으켜줘.”
엉덩이가 너무 아프다며 연지가 징징거렸다. 그렇지만 현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강습을 받는 이유가 있네.”
“우리도 받을까?”
“나는 지금껏 넘어진 것이 아까워서 못 받을 거 같아. 자기라도 받을래?”
“나도 오기가 생기네. 우리 강습하는 거 멀리서 훔쳐보자.”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현균이 힌트라도 얻었는지 자세를 잡고 폴을 찍으며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몇 발짝을 미끄러져 갔다.
“나 된다, 돼.”
“우와! 어떻게 한 거야?”
“봐! 이렇게 발목에 힘을 줘서 스키 플레이트를 안쪽으로 조금 세운다는 기분으로 날을 이용하니까 되네. 그리고 강사가 자꾸 ‘A’자를 만들라고 하잖아. 이렇게 하니까 안 넘어져.”
현균이 득의양양했다. 연지도 얼른 그를 따라 해봤다.
“와! 나도 된다!”
“오케이! 우리 천재 인가봐. 우리 골프 말고 스키를 했어야 하네. 그랬으면 국대 됐겠다.”
“맞아. 자, 가자!”
두 사람은 스키장 베이스에서 한참동안이나 미끄러지며 놀았다.
“근데 나 배고파.”
“나도 힘이 많이 빠졌어. 오늘은 그만 하고 내일 리프트 타보자.”
“그러자! 내일 리프트 도전!”
둘은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며 객실로 돌아왔다.
객실에서 저녁을 만들어 먹는 것도 행복했다. 설거지를 마친 두 사람은 잔에 와인을 채우고 창가에 다가섰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졌다. 그렇지만 스키장은 아직도 야간스키어들이 있어 대낮처럼 밝았다. 주변은 깜깜한데 정상으로부터 이어지는 슬로프만 밝아 전체적으로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와인을 음미하며 가벼운 스킨십을 나누는데 어느덧 스키장에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벌써 야간 스키가 끝났나봐.”
두 사람이 몸을 돌려 거실로 향하려는데 슬로프쪽에서 갑자기 ‘삐뽀삐뽀’하는 경보음이 들렸다. 놀란 두 사람은 뒤돌아 보다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와! 저게 뭐야. 불도저 같이 생긴 것들이 슬로프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어. 그 뒤를 오토바이 같은 것들이 뒤따르며 올라가!”
스키장을 처음 본 그들은 야간 정설 작업을 본 적이 없어 신기하기만 했다. 조명탑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주변의 어둠 속에서 새하얀 슬로프만 반짝이는 가운데 비클과 스노우모빌이 슬로프를 정리하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볼거리였다.
새로운 경험으로 설레는 마음은 그대로 몽글몽글한 감정이 되어 두 사람의 스킨십은 농도를 더해갔다. 문득 연지의 머릿속에 오늘이 배란일임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녀는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그의 아이가 생긴다면 그의 허락에 관계없이 낳아 기르고 싶었다. 무르익은 분위기 탓인지 그의 남성도 오늘은 힘을 불끈 내고 있었다. 커튼이 활짝 열려진 상태의 창밖은 아직도 불빛이 대낮처럼 밝아, 불을 켜지 않은 거실임에도 둘의 젊은 나신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무엇에도 거리낄 것이 없는 자유롭고 따뜻한 공간에서 젊음들이 불꽃을 발산하고 있었다. 눈에 둘러싸인 스키장에서의 밤이 뜨겁게 타올랐다.